매일 KPI 달성하는 삶

퇴사후 프라하 한인민박 스탭으로 살기

by 설다운

어스름한 새벽. 알람시계를 끄고 일어나 작업복을 입는다. 집 앞 자판기에서 늘 마시던 캔음료를 뽑으며 차에 올라탄다.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집어넣으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올드팝이 흘러나온다. 어제도 봤고 내일도 볼 풍경을 보며 달리지만 음악이 달라 그런지 새롭다. 해가 뜨기 전에 첫 번째 공공화장실에 도착해 청소를 시작한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 몇 번이고 반복되는 주인공의 일상이다. 도쿄의 공공화장실 청소부의 삶을 담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대사가 거의 없다. 동료나 가족,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의 대사만 가끔씩 나올 뿐. 사람 말소리 보다 짤랑거리는 열쇠꾸러미 소리, 청소도구를 내려놓는 소리, 뽀득거리는 걸레 소리가 더 자주 들려 눈으로 보는 ASMR 같다.


주인공은 쳇바퀴 같은 일상을 하루하루 음미하듯 보낸다. 누군가에겐 지루할지도 모를 삶이지만, 그의 얼굴엔 명상이라도 하듯 늘 미소가 묻어 있다. 아침마다 거실에 키우는 모종에 정성껏 분무기를 뿌리고, 공공화장실 청소 중엔 우연히 발견한 틈새 쪽지로 이름 모르는 누군가와 빙고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작은 일에도 쉽게 감사와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하기 싫어하지만, 딱 한 사람의 꾸준한 노동만 있으면 누구나 기분 좋은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일. 주인공은 화장실 청소가 그런 일이란 걸 알기에 오히려 자부심과 적지 않은 보람을 느끼는 듯하다.


영화를 보면서 ‘저런 일상을 보내면 어떨까?’ 궁금했는데, 얼마 안 가 프라하의 한인민박에서 <퍼펙트 데이즈>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아침 8시가 되면 광화문 고층빌딩이 아닌 프라하의 유서 깊은 건물에서 조식을 준비한다. 매일 세면대와 변기, 욕조를 닦고 마룻바닥을 쓸고, 이불과 수건을 세탁기에 돌린다. 이곳엔 끝이 안 보이거나 성과가 불투명해 전전긍긍하는 프로젝트 같은 건 없다. 매일 끝이 보이고, 성과가 투명한 노동뿐. 손님들이 화장실을 쓰거나 침대에 누울 때 ‘참 깨끗하고 좋다!’고 느끼면 그날의 KPI는 달성이다. 매일매일 KPI를 달성하는 삶. 단순하지만 귀하다.


작년을 뛰어넘는 성과 혹은 새로운 업적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운 시간. 어쩌면 나는 이게 그토록 간절했던 것 같다. 작년즈음부터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성장했고 앞으로 또 얼마나 성장 가능성 있는 사람인지 증명하는 일에 현타가 몰려왔다. 지난 몇 년간 나의 환승 이직은 스윙스 <Keep going>의 도입부 같았다. “증명해 증명해 증명해 또” 그런데 최근엔 이력서와 이직 면접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또? 게임 캐릭터가 아닌데 어떻게 발전만 하지. 사람이니까 후퇴도 하고 숨이 차면 쉬어갈 수도 있는 건데.’


어쩌면 이직의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더 높은 처우를 받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젠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찾는 것이 목적이다. 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가 ‘삶에 꼭 대단한 목표가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안정되고 평온한 지금의 삶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 적이 있는데 프라하에서 한인민박 스태프로 지내며 그 말의 뜻을 체감하고 있다. 동료 혹은 과거의 나와 경쟁하는 일보다 생각보다 단순하고 작은 일들이 삶을 더 즐겁고 명랑하게 만든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도브리프라하에서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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