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가 가르쳐준 것

3개월의 유럽여행을 마치고 느낀 점

by 설다운
한국 오자마자 갭이어가 끝났음을 알리는 메일을 받았다.


미리 고백하자면, 갭이어 중 면접을 봤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2차 면접을 봤고 순식간에 다음 달부터 새로운 회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에게 다음 달부터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을 때 다들 지독하다는 반응이었다. 마지막 여행지로 코펜하겐에 있을 때 아침 6시에 호텔에서 화상면접을 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연차가 쌓이면 여유를 가질 줄 알았는데 신입 때보다 조급하다. 핑계를 대자면 입주 예정인 아파트 잔금마련 때문에 경제적인 압박이 있었다. 이력서의 공백기가 길어지면 쉬는 동안 무얼 했는지 증명해야 하는 난이도가 높아졌을 테고, 마케터니까 아무래도 감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것도 있.. 지만 역시 핑계일 뿐.


프라하 한인민박에 스탭으로 지내면서 사장님과 이런 대화를 한 적 있다.

- 사장님은 휴가가 없어요? 365일 매일아침 이렇게 조식을 준비하는 거예요?

- 신정이랑 1년에 한 번 한국 갈 때 빼고는 매일 이렇게 조식 만들지

- 그럼 놀고 싶을 땐 어떻게 해요? 쉬고 싶을 때 없어요?

- 나는 근데 한국에서도 이랬어. 늘 바빴거든. 그래서 누가 쉬라고 하잖아? 그럼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몰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왜 모르지? 그냥 누워서 쉬거나 넷플릭스만 봐도 그게 쉬는 건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안타까워해야 하는 사람은 사장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퇴사하고 떠난 프라하에서 나는 분주했다. 한 달에 7일의 휴무가 주어지는데, 그 휴무를 어떻게 야무지게 써야 후회 없을지 머리를 굴리느라 캘린더를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3개월 동안 프라하에서 이탈리아로, 스페인으로, 스위스로, 덴마크로 쉼 없이 또 여행했다. 그러는 동안 유럽에서 렌터카를 빌려 혼자 주차사고를 내기도 하고 버스를 잘못 타기도 했다. 내가 언제 유럽을 다시 나와보겠어 하며 시간을 분초단위도 꽉 채워 쓰려고 매일 2만보 이상을 걸어 다녔다. 여행하는 내내 하루도 푹 잠을 잔 적이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유명 관광지에서 줄을 덜 서니까, 유럽은 여름에 노을을 보려면 밤 9시는 넘겨야 하니까. 또 비싸게 주고 산 관광패스를 본전 뽑으려면 늘 바빠야 했다.


여행하는 동안 여기저기 아팠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고 늘 불규칙적으로 생활하다 보니 몸이 항상 부어 있었다. 어떤 날은 잇몸이 퉁퉁 부어서 밥 먹는 게 불편할 정도였다. 이부자리에서 핸드폰을 보는데 양 손목에 쥐가 나서 30분씩 저린 건 일상이었다. 이러는 도중에 내가 언제 이런 시간을 보내보겠냐며 사진이며 영상을 수없이 찍고 직업병으로 숏폼도 잔뜩 만들어 SNS에 업로드했으니, 누가 보면 안식년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여행사에서 보낸 콘텐츠 마케터인 줄 알았을 것이다.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몰랐다. 갭이어를 가지겠다고 했지만, 늘 바쁘고 정신없는 일정을 소화하며 계속 '일'을 했던 것 같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주변 지인들을 만나는 일, 해외에 머무는 동안에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 미지의 세계를 부지런히 여행하는 일. 그 어디에도 '평안'은 없었다.


평안 (平安)
걱정이나 탈이 없음. 또는 무사히 잘 있음.


평안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걱정이나 탈이 없는 것이라고 나오는데, 난 걱정도 많고 탈도 많았다. 여행하는 내내 오늘 하루가 차질이 없기를 바라는 걱정, 다시 원하는 회사에 취업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마음의 준비가 채 되기도 전에 다음 여행지를 생각하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호텔을 잘못 예약하는 등 멍청비용도 꽤 날렸다. 평안하지 않은 안식년이라니 조금 슬프다. 나는 그저 잘 쉬어보고 싶었던 건데.


이번 갭이어를 통해 깨달은 게 있다면, 나에게 안식은 단순히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난다고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거다. 한국에 있더라도, 그게 비록 작고 좁은 내 방일지라도 걱정이 없고 탈이 없으면 그게 곧 나를 쉬게 하는 거였다. 꽤 긴 시간과 큰 비용을 들여 얻은 교훈이니 다시 내 일상에서 그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 일을 꼭 그만두지 않아도 나 스스로 평안을 느끼고 안식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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