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을 시간
드디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집어 들었다. 두께 4cm가 넘는 책. 요즘은 여간한 책 아니고서는 읽을 수가 없다. 내 안이 그리 평온하지 못하다 보니 경박하거나, 심란하거나, 마음 무거운 글들은 피하고 싶다. 진즉 사두고 묵혔던 책을 집어 든 것은 이렇게 내 안이 푸석푸석할 때 그 아름답다는 명문을 찬찬히 접하고 싶어서다.
표지를 넘기니 나오는 첫 글
“앤 드루얀을 위하여: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이런 식의 찬사를 바치는 사람,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만나는 사람이, 정말 세상에 있구나 싶어서 순간 멍하니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에 책을 빌려서 수르르 읽었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문장이다. 물론 내용도 두루뭉수리 할 뿐 구체적인 것 하나 남아 있지 않지만. 이런 글도 지나칠 정도였다면 아마도 그때의 독서는 지적 허영이었나 보다 싶은 생각과 더불어 한편, 내 건망증도 어쩌면 이제 한계치에 이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 당시 내 메모 노트에 이 문장이 옮겨져 있지 않는다는 보장도 못하겠으니 말이다.
여하튼 이 문장에서부터 시작된 이 책 읽기는 절대 통독이나 난독의 대상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차지하는 마음의 공간은 행성과 은하에서 무한대까지 확장되고 시간은 최소한 광년에서 영겁을 오간다.
일하다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잠깐씩의 비는 시간이 감사하기 그지없다.
한데 나는 수시로 책장을 덮고 일도 하고 환자들 푸념도 들어주고 전화도 받아야 한다. 내 마음의 공간은 저 넓이나 깊이조차 알 수 없는 광막한 시간과 우주를 헤매다가 수시로 현실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멀미가 날 지경이다. 오늘따라 버스 시간에 맞추느라 약국에 잔뜩 앉아서 기다리시는 노인 분들의 집안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터무니없는 말을 받아주는 일이 오늘은 지겨워지려고 한다.(난 헌신적인 사람과는 거리가 먼 인간인가 보다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오늘 같은 날은, 용무가 끝났으면 바로바로 나가주시면 좋겠다는 생각. 난 일처리를 LTE급으로 하는데 이에 반해 오늘따라 환자들은 약국에 더 오래 머무르며 이런저런 말을 많이 시키는 거 같아 싫다는 생각.(내가 의료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것은 맞는데 내가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이런 날, 이럴 때는 생각해보게 된다.)
반나절 이러고 나니 기운이 빠진다. 책을 덮는다. "내게 책 읽을 시간과 자유를 다오!"라고 외치고 싶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공간에서 세상에서 제일 편한 맘으로 책을 읽고 싶다. 그냥 이 책 속 공간에서 머무르며 시간도 그렇게 흐르게 했으면. 가끔씩 책장을 덮고 툭 트인 곳이나 숲에 가서 산책을 하며 그 여운을 느끼고 다시 돌아가서 그 책 속에서 있었으면. 나 스스로 그곳에서 나올 때까지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으면, 제발.
내 안이 뻑뻑할 때는 멀리 시간과 공간을 넓혀서 보고 싶다. 새의 눈으로, 인공위성의 관점에서, 더 나아가서는 우주의 한 모서리에서. 비행기에 올라 훌쩍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마찬가지다. 이 땅 위 내 시각에서는 복작거리고 슬프거나 기쁜 일이 고도를 조금만 높여 비행기에서만 봐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의 생각으로 조망되는데 우주의 관점에서야 말해 무엇하랴.
‘칼 세이건’은 이 책을 병마와 싸우는 마지막 기간에 썼다.
“골수 이식이 진행되는 몇 개월 사이에 책을 두 권이라도 읽는 환자를 본 적이 없다.”라고 의사들은 말하는데 그는 두 권의 책을 집필한 것이다.
범인과 초인의 차이를 따지기에 앞서 그런 사람과 같은 시대를 살았고 그의 글을 접할 수 있음을 감사할 뿐이다.
몇 년 전에 써둔 이 글을 읽다 보니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난다. 일에 치인 바쁜 일상이 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때.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은 늘 뒷전이던 때.
지금은 물론 책 읽을 자유와 시간을 넉넉히 지니고 있다. 잊고 있던 그때를 생각하며 그때 원했던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음과 더불어 청춘을 한참이나 지난 내 나이에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