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감과 동지애

하와이 여행에서 만난 일

by 시우

딸아이는 여행지에서도 늦게까지 꿀잠을 잤다. 제 방 깊숙이 아침 해가 들 때까지 자고 일어나 새로운 장소, 새로운 문화의 신선함을 느긋이 제 일상처럼 접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모양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라서 오전에는 푹 쉬기로 한 날이었다. 하지만 늦은 단잠을 즐기는 것은 희망 사항일 뿐 일찍 눈이 떠져서 계획에 없던 아침 시간을 몽땅 얻었다. 앞 바닷가 산책 대신 이곳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파머스 마켓에 가보기로 했다. 서양의 여행지마다 있는 이 파머스 마켓이란 대부분이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의미한다. 즉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새벽에 열렸다가 해 뜨면 파장하는 도깨비시장과 같다. 우리의 오일장처럼 요일을 정해서 열리는데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싱싱한 채소나 과일,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지역 고유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어 여행지에서 기회가 되면 빼놓지 않는 아이템 중에 하나다.


20181013_102254.jpg
20181013_095701.jpg
20181013_100933.jpg


차로 새벽길을 10여분 달려 근처 마을 공원에서 일요일마다 열린다는 파머스 마켓을 찾아갔다. 장터 입구부터 제법 번잡했다. 주차장은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이미 빽빽하니 차가 들어차 있었다. 축제 때 열리는 우리네 난장처럼 흰 뾰족 차일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차장을 막 벗어나 장터로 들어서려는 순간 배에서 신호가 왔다. 까짓것, 공원이니 화장실을 찾으면 될 일이라 남편에게 말을 하고 함께 화장실 건물을 찾아갔다. 한데 웬걸, 줄이 3미터도 넘게 밖으로까지 늘어서 있다.

그래도 커다란 화장실 건물을 믿고 서 있는데 10분이 지나도 도무지 줄이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 뒤로 선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칸칸마다 변비 환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나 싶었다. 궁금하고 급한 마음에 안으로 들어가 봤다. 그 큰 화장실 건물에 달랑 세 칸의 화장실이 있었는데 한 곳은 우리 집 작은방 만한 탈의실이었고 두 칸의 화장실 중 한 곳은 "고장"이라고 씌어있었다. 물이 잘 안 내려가서 그러나 싶지만 급한 마음에 사용해볼까 하고 문을 열어보니 고장 난 변기를 아예 비닐로 밀봉을 해놓았다. 나 같은 사람들을 방지하기 위한 지혜로운 조치였다. 뒤돌아와 내 순서에 다시 서 있으려니 멀리서 불안하게 지켜보던 남편이 다가와 어찌 된 일인지 묻는다.

"가보니 화장실이 딱 한 칸이라서 내 차례 오려면 아직 멀었네."

"어떡하지? 큰일이네. 아까 오다가 본 마켓에라도 차 타고 가볼까?"

"주차장서 차 가지고 왔다 갔다 하기도 그렇지만 이 시각에 마켓이 문을 열었을까 싶지 않네."

"그럼 어쩌지? 어디 으슥한 숲 같은 건 없나...."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느라 등에 식은땀이 날 지경인데 아직 내 차례는 요원하다.

그때 나보다도 더 좌불안석이던 그가 살금살금 다가오더니 낮게 속삭인다

"나 따라와 봐."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여자 화장실 반대편에 자리한 남자 화장실이었다.

"지금 안에 아무도 없어. 얼른 들어가."

이거 저거 체면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입구를 지키는 남편을 믿고 직진해서 들어갔다.

볼일을 마치고 나니 다리에 힘이 좍 풀렸다. 한데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인지라 그때까지 사람이 없자 세면대에서 손까지 씻었다. 그때 등치 큰 남자가 들어선다. 잽싸게 나왔다.

"남자 화장실을 내내 지켜봤는데 마침 막 비더라고 정말 다행이야."라며 나보다 그가 더 안심하며 다행스러워했다.

'왜 하필 이 시간에 신호가 와서 곤란하게 한담.' 따위의 표정으로 멀리서 뒷짐 지고 남처럼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서 고마웠다. 전에 그럴듯한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도 훨씬 기분 좋았다.

딸애의 말처럼 난 "배우자에 대해 너무 기대치가 낮은 게 문제."인지는 몰라도 난 그에게 대단한 유대감과 든든한 동지애를 느끼며 그날 새벽을 즐겁게 보냈다.

장터에서 아침도 사 먹고 딸 몫으로 싱싱한 아사히 볼과 수박주스도 사서 돌아왔다.


20181017_181713.jpg
20181019_182116.jpg
20181019_175332.jpg


그 며칠 뒤였다. 석양을 보러 떠난 서쪽 해안의 어느 바닷가에서였다.

돗자리 깔고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으며 느긋이 쉬는데 그가 갑자기 화장실을 찾으며 일어섰다. 해변의 저쪽 끝의 건물이 화장실 같다며 일어선 그가 한참 후에 돌아와 씩 웃으며 말한다. 가보니 화장실이 아니었다나. 어느 공원에나 잘 갖추어져 있는 화장실이 보이지 않으니 저녁 수영을 즐기러 나온 그곳 노인에게 물었단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 있나요?"

"여기는 화장실이 없어요. 한데 무슨 걱정이요. 저 넓은 바다나 저쪽 나무들 뒤에 아무데서나 대충 볼일을 해결하구려."라며 껄껄 웃었단다.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느껴지는 진한 인류애와 동질감이라니!


그날 그 해변과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웠고, 해변에서 들리던 둘리 만화에 나오는 마이콜을 닮은 청년의 우쿨렐레 소리가 기가 막혔던 것이 꼭 석양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코스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