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만났던 풍경
아침 일찍 커다란 냄비에다가 감자와 계란을 잔뜩 삶았다.
그린델발트에 도착한 첫날 마트에서 팩으로 된 감자와 양파를 샀는데 떠나는 아침까지 많이 남아 있었다. 남은 계란을 전부, 감자는 넉넉하니 우리 세 식구가 먹을 만큼 삶고 나머지 식재료는 민박 주인 할머니께 드렸다.
그날은 기차를 타고 그린델발트에서 인터라켄을 거쳐서 네 시간 남짓 제네바까지 가야 했다. 시간으로 봐서 기차에서 점심때를 맞는다. 한국 같으면 도시락으로 김밥이라도 말겠지만 여기는 스위스다.
팩에 삶은 감자랑 계란을 담고 소금을 챙겼다. 보온병에 차까지 담은 점심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며칠 전 트랙터(소똥 뿌리는 기계?)로 인근 풀밭에 거름을 주어 아직도 냄새가 가시지 않은 들을 지나 역으로 향했다. 우리 농촌에 가면 먼저 코에 스치는 그 거름 냄새는 우리 시골이나 스위스 시골이나 마찬가지라 처음에는 역했지만 적응하고 나니 익숙했다.
그린델발트 역에서부터 출발하는 기차에 우리 세 식구가 마주 보며 자리를 잡자 금발의 멋쟁이 여인네가 합석을 했다. 복도 옆쪽의 좌석에는 젊은 아빠가 초등학생인듯한 딸 둘을 데리고 앉았다. 그는 앉자마자 배낭에서 그릇과 칼을 꺼냈다. 방금 사 온듯한 마켓의 봉투에서 당근 사과 오이를 꺼내더니 주머니칼로 저며 먹기 좋은 크기로 그릇에 담는 것이었다. 설령 유기농 채소를 샀다고 하더라도 흐르는 물에 박박 문질러 서너 번을 씻어서야 안심하고 먹는 우리네 눈으로 보자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 젊은 아빠는 능숙한 솜씨로 채소를 자른 다음 커다란 비스킷을 꺼내어 놓았다. 자른 채소와 비스킷이 그들의 점심거리인 모양이었다. 1학년쯤 되어 보이는 작은 딸은 천방지축 개구쟁이로 보이고 삼사 학년은 되어 보이는 큰애는 기차에 오르자마자 책을 펴 들고 앉아 있었는데 새침데기 모범생 같았다. 아빠가 잘라주는 채소와 비스킷을 먹으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몰입해 있었다.
일반 스위스 기차는 지정 좌석표가 없는데도 내가 탄 칸은 어린이 동반인만 타는 차량인 듯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탄 부모들이 많았다. 마치 어린이들 소풍 가는 전세 기차 칸 같아 보였다.
몇 정거장 가지 않아 12시가 되었다. 놀랍게도 누가 "이제부터 점심 먹기 시~작!"이라고 외치기라도 한 듯 일시에 점심거리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산스러운 아이들로 웅성대던 기차 안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우리 좌석에 합석했던 멋쟁이 금발은 마치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서더니 다른 칸으로 옮겨 가버렸다.
옆 좌석의 작은 딸은 당근을 들고 먹으며 복도를 돌아다녔다. 다른 좌석의 제 또래와 이야기를 하고 그쪽의 먹거리를 얻어오기도 했다. 여기저기 좌석마다 애들은 깔깔대고 투닥거리고 부잡스럽게 돌아다니고 엄마 아빠들은 애들 챙기랴 먹이랴 부산했다. 우리나라나 꼭 같았다. 단지 애들에게 소리치는 엄마가 없다는 점만 다를 뿐.
혹시나 기차 안이 너무 조용해서 냄새 피우고 뽀시락 거리며 점심을 먹는다는 게 눈치 보이면 어떡할까 생각했던 우리의 걱정은 기우였다. 우리도 좌석의 간이 테이블을 펴고 아직 따듯한 기가 남아있는 삶은 감자와 계란을 꺼내놓고 소금을 찍어가며 맛있게 먹고 마셨다. 전혀 눈치 볼 일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새초롬이 그냥 앉아있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가끔씩 대여섯 살 먹은 녀석들이 우리 좌석 빈자리에 와 앉아서 제 손에 든 것을 먹으며 우리를 빤히 바라다보다 가기도 했다. 녀석들은 대부분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돌아다녀서 양말 바닥이 탄가루가 묻은 듯 새까맷다. 눈에 장난기가 가득한 그 녀석들에게 삶은 감자를 하나씩 쥐어주고 싶은 맘이 굴뚝 같이 들기도 했다. 여하튼 우리네 이웃지간의 아이 동반 여행이나 다름없이 먹을 것을 나누고 함께 애들을 챙기며 떠들썩하던 이들도 한참 후에는 역에서 내리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아마도 기차에서 만나 통성명을 하고 애들 때문에 친해진 사이들인 것 같았다.
제네바에 가까워지면서 아이들 모습도 사라지고 기차 안은 다시 평소의 그 조용함이 찾아들었다.
거름 냄새가 진동하는 시골 마을, 그 누구도 그 쿰쿰한 냄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곳. 아이들을 서로 먹이고 돌보며 부모들끼리 이내 가까워지는 사람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 풍경에 나도 몇십 년 전으로 돌아간 듯 그만 마음이 푸근해졌다.
목적지인 제네바에 가까워질 때쯤엔 이역만리의 여행자라는 생각도 없이 난 그만 느긋하니 잠에 빠져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