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가을 입구에서

by 시우

올여름은 작년 여름에 비하면 그래도 점잖은 편이다. 작년에는 갑자기 빰을 맞듯이 훅 들이닥친 혹서로 겨우 숨만 쉬며 여름이 가기만 바랬었다. 올해는 서서히 달궈지고 태풍 덕에 비도 제법 온 데다가 열대야가 많지 않아 예전의 여름 정취를 다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요 며칠의 더위와 열대야 정도야 그냥 여름이 마지막 몽니를 부리나 보다 하고 봐주고 있다.

절기로 따지자면 이미 입추와 말복이 지났고 다음 주에는 처서가 들어있다. 처서야말로 진정한 입추다. "처서가 오면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라는 말이 있듯이 땡볕이나 물것들도 기세가 꺾이고 풀도 여름처럼 잘 자라지 않는다.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 듯이 이제 귀뚜라미와 뭉게구름이 등장할 계절이 다가오니 까짓 요 며칠 무더위야 애교다. 이처럼 시간이 가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서서히 바뀌고 변한다. 자연의 리듬에 맞춰서 그야말로 자연스레.

올해는 유독,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계절은 덥더라도 시야가 확 틔어 시원했던 우리 집도 뒤에 재개발로 고층 아파트 건설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뒤쪽 시야가 탁 막혀버리는 불상사가 생겼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할 때 보이던 먼 산이 사라졌다. 매일 시꺼먼 시멘트 골조가 끝도 없이 하늘로 치솟더니 이제 끝에 다다른 모양이다. 멀리 동쪽 너머의 먼 산과 서쪽의 먼 산이 이제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 꼭대기 너머로 겨우 북쪽의 산머리가 조금 보이고 아파트 동 틈새로 백화점 광고판이 겨우 보이는 정도. 잔잔한 곡선으로 아스라이 보이던 스카이라인이 사라졌다. 전에 비하면 갑갑하기 그지없지만 앞 동과 뒷동만 보이는 다른 아파트에 비하면 이것도 어디냐고 자위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정기 검진을 받다가 이상이 발견되었다.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진을 해보라는 말에 정말로 커다란 병원을 찾아 서울까지 오가며 한동안 불편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별 것은 아니래서 수술 예약만 잡고 와서 느긋이 기다리는 중이다. 입원 기간에 잠깐의 고통이나 불편만 참으면 되려니 생각하고.

나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의 황당한 소식도 있어 함께 걱정하고 안도하면서 지내다 보니 올여름이 후다닥 지나고 있다. 내게는 유난히 길고 긴 여름.

이제 곧 덥고 습한 기운이 가시며 청정해지리라 기대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나만 특별히 대우받을 일도 또 턱없이 당할 일도 없이, 넓게 보면 다들 고만고만한 일들을 겪으며 사는 거 같다. 또 그러려니 하며 지나다 보니 이런 게 "나잇값"인가 싶기도 하다. 나이를 먹는데도 상당한 대가를 치른다. 결코 거저먹는 게 아니다. 먹는 음식값을 치르듯이 나이 먹는 값도 치르며 사는 일. 또 그런 것을 묵묵히 감내하며 지내다 보면 세월이 가나 보다.

입추 말복이 가고 처서 백로가 다가오고, 올 한 해가 가며 나이 들고, 숲의 나무들과 아이들은 훌쩍 자라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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