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고향은
오래전 우리 약국 옆으로 작은 골목이 있었다. 약국 앞의 4차선 대로변에 이은 골목이었다. 맞은편 관공서 앞길은 ‘벚꽃길’이라는 길 이름이 말하듯 해묵은 벚나무 가로수가 아름다워서 봄이면 근처 아파트 주민이나 유치원 아이들이 벚꽃 구경을 오는 곳이었다. 근무하면서 바라보는 약국 길 건너편은 봄이면 흰 벚꽃이 흐드러졌고 여름이면 무성한 푸른 그늘 밑 벤치에 사람들이 앉아 쉬었다. 한가한 날 점심시간이면 약국 유리 너머의 풍경을 그림인 듯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잠깐 짬이 나는 점심시간에는 옆의 골목길을 무연히 어슬렁거리곤 했는데 그 안에 있는 아담한 기와집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지나면 서로 어깨가 닿을 것 같은 좁고 오래된 골목이었다. 담 너머까지 드리운 감나무 가지에는 주먹만 한 수시감이 손이 닿게 달려있었다. 해묵은 감나무는 울안 마당에서부터 담 너머까지 뻗어 있었고, 감나무 너머로는 실하게 열매를 단 대추나무가 보였다. 게다가 그 집은 그냥 기와가 아닌 암수가 맞물린 옛날 기와지붕이었다. 지붕 주위로는 함석 물받이를 둘렀고 대문은 나무문으로 낡았지만 그에 어울리는 작은 지붕을 얹고 있었다. 살짝 열린 대문 사이로는 횡으로 길게 드러난 마당과 앞의 담장 아래 자리한 화단, 그 앞으로는 긴 마루를 가로지르는 유리 분합문이 보였다. 화단에는 너무 흔하고 익숙해서 요즘은 오히려 귀한 채송화나 한련화, 봉숭아, 맨드라미 같은 꽃이 흐드러져 피어있었다. 아마 노인분이 사시는 집일 거라고 짐작했다.
처음 그 집을 발견한 날, 난 잊고 있던 익숙한 풍경을 문득 마주한 것 같아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 후로는 가끔씩 이 골목길을 서성이면서 혼자만의 세계에 머물곤 했다. 그곳은 초등학교 적 교과서에 나오는 착한 영희와 철수가 사는 골목이 되기도 하고 “덕자야 놀자.” “영남아 학교 가자.”라고 담 너머로 소리쳤던 예전의 우리 집 골목길이 되기도 했다. 밥 짓는 매캐한 연기가 나직이 깔리는 해 질 녘, 한데서 노는 아이들을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들이 울리던 골목이 되어주었다.
가끔은 대문에서 방울 달린 빨간 목줄을 두른 재색 토종 강아지가 나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녀석은 짖기는커녕 방울을 딸랑이며 나를 졸졸 따라 큰길까지 나오곤 했다. 그럴 때는 부러 화난 듯 발을 굴러 녀석을 쫒아서 대문 안으로 들여보내는 게 일이었다.
점심시간 잠깐의 골목길 산책이었지만 마치 과거 행복했던 어느 시간대에 오래도록 머물다 온 기분이었다.
약국의 내 자리에 돌아와 따끈한 차 한 잔을 마시다 보면 마치 볕을 쪼인 햇솜처럼 내 안의 굳은살이 따듯하니 부풀어 말랑말랑 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날은 약국의 공기마저도 더 온화하니 느껴졌다. 늘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약국 생활에 나만의 은밀한 시공간을 지닌 기분이었다.
약국에서는 처방전을 내밀고 약을 받는 환자들이나, 뭔가가 필요해서 잠시 들러 용무를 보는 사람들을 온종일 접한다. 그저 “환자”로 분류되어 “약사”인 나와 만나는 사람들도 제각기 안으로 나름의 소중한 뜰을 지닌 사람들일 것이다. 내가 느긋한 여유를 지닌 날은 비록 잠시 스치는 사람들에게서도 각기의 결과 빛깔을 보게 되어 반복되는 일상도 넉넉한 리듬을 타고 흘렀다.
몇 년 후 약국 옆에 자리한 병원이 근처의 집들을 사들여서 증축공사를 시작했다. 약국 뒤쪽과 옆 골목의 집을 죄다 사들였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몇 달간의 지루한 공사가 거의 끝나가던 늦여름 아침이었다. 월요일 출근길에 보니 주위 풍경이 확 바뀌어 있었다. 약국 옆 골목의 맨 앞 건물만 그대로 남고 골목 안쪽이 휑했다.
오전 일을 마치고 점심시간에 골목길로 가 보았다. 그곳은 이제 골목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민망한 공간이 되어있었다. 골목 한쪽은 이미 병원 건물의 육중한 벽이 들어서 있고 그 기와집과 옆에 있던 몇 채의 양옥은 죄다 헐려있었다. 그 집 마당에 있던 감나무는 가지가 상한 채 초췌한 모습으로 서 있고 앞 화단에 있던 보랏빛 과꽃 덤불은 짓이겨져 있었다. 거칠게 건물을 철거해간 듯, 집이 앉았던 자리에는 시멘트 구조물만 남았다. 그 집터의 흔적은 너무나 보잘것 없이 좁고 초라해서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집의 흔적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가늠해보았다. 앞으로는 분합문이 있었을 긴 마루, 마루 안으로는 안방이었을 직사각형 이간장 방 그 안방 좌우로 작은 방이 하나씩. 왼쪽 작은방 뒤의 부엌 자리 그리고 안방에 이은 뒤편 골방 자리는 화장실로 개조를 했었던 듯 타일 조각이 바닥에 남아 있었다. 이 작은 방에는 벽장, 안방 위로는 다락이 있었을까. 하나하나 눈으로 덭으며 마치 내 어렸을 적의 우리 집을 복원하듯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뜯겨 나가 이제는 텅 빈 대문 자리를 나서며 마치 내밀했던 내 작은 세계가 허물어진 듯 허전했다.
얼마 후 그 골목은 잿빛 콘크리트로 단장한 병원 주차장이 되어 승용차들이 들락거렸다.
단아한 집, 푸른 감나무 그늘과 화단, 내 마음에 들리던 아이들의 재잘댐, 할머니와 엄마의 목소리, 밥물 잦아드는 냄새, 강아지의 방울소리가 사라진 그곳은 이제 나와는 아무런 연이 없는 무미건조한 장소가 되고 말았다. 내 일상에 너른 시간과 공간을 보여주던 작은 창도 굳게 닫히고 말았다.
나 역시 그 이후로는 그곳을 어슬렁거릴 일도 다시는 없었다. 그저 가끔씩 예전의 기억을 반추하며 앞의 벚나무 가로수 그늘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