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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Oct 19. 2021

Sad movie’와 순주 할머니

내가 예닐곱 살 때쯤이었을 것이다. 이름이 순주라서 '순주 할머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할머니가 있었다. 말이 할머니지 20대 초반쯤이었는데, 촌수가 높으니 그리 부르는 것이라고 우리 할머니가 일러주셨다. 내가 '순주 할머니'라고 부르고 따라다니면 곰살맞게 잘 놀아줬다. 우리 집에 자주 왔었고 집안 어른들에게도 얌전하다고 칭찬 듣는 할머니였다. 그래서 난 그 '순주 할머니'를 아주 좋아했다.     


한 번은 그 '순주 할머니'를 따라 집에 놀러 갔다. '순주 할머니'네 집은 우리 집에서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집에 들어가기 전 울밖에 커다란 텃밭이 있었고 함석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왔다. 마당에는 우리 집에는 없는 작두 펌프가 있어서 펌프질 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펌프의 바킹이 낡아서인지 펌프질을 하려고 보면 꼬르륵 물이 빠져 있곤 했다. 옆의 수통에서 마중물을 한 바가지 넣고 마구 펌프질을 하면 물이 기운차게 위로 희게 솟구치며 올라왔다. 그때 느꼈던 그 뿌듯함과 손에 묵직하게 전해지던 솟구쳐 오르는 물이 주는 압력의 생생함이라니.


그 '순주 할머니'네 집에는 그 할머니 말고도 여자 형제가 셋이나 되었는데 모두 혼기가 꽉 찬 큰애기들이었다. 함께 수를 놓기도 하고 집안일을 거들기도 했는데 다들 싹싹하고 부지런했다. 우리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딸네들이 다들 얌전하고 부지런해서 복이 붙을 집"이었고" 그 집 처자들 데려가는 남자는 "복덩이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순주 할머니 집에 놀러 가는 것이 난 아주 즐거웠는데 내가 그때 놀러 가서 들은 노래가 '쌔드 무비' 번안곡과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였다. 아랫목 이불에다 발을 묻고 둘러 않아서 수를 놓으며 할머니 자매들이 흥얼거리던 그 노래는 무척이나 흥겹고 이국적이며 멋있어 보였다. 그러나 내가 자라면서 그 노래는 어렸을 적 기억 속으로 까마득하니 잊히고 말았다.     

 

대학 때 팝송에 한창 열중했을 때 흘러간 팝송으로 듣는 "쌔드 무비"는 반갑고 새로웠다. "수 톰슨"의 귀엽고도 탱글탱글한 목소리로 듣는 이 노래의 가사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슬픔이란 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 사춘기 소녀의 성장 에피소드 같아서 귀엽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사귀던 남자 친구가 바쁘대서 혼자 극장에 갔는데 양다리 걸친 이 남자 친구 녀석이 하필 그날 내 친한 친구랑 앞자리에서 데이트를 하는 걸 보게 된 것. 그들 눈에 띄지 않게 몰래 나와서 혼자서 울며 집에 갔는데 엄마가 왜 우느냐 물으니 하는 말 "슬픈 영화는 항상 나를 울려요."라는 내용의 가사다.

물론 나는 이 가사를 죄다 외워서 한동안 흥얼거리며 입에 달고 살았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어렸을 적의 그 '순주 할머니'와 엮인 아기자기했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노래도 추억으로 듣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요즘 나온 아무리 좋은 노래라도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는 예전의 노래들보다는 그 감동이 덜하다. 이번에 이 노래 가사를 가만히 떠올려 불러본다. 대충 가사가 생각나는 거 보니 아직 치매는 아닌가 보다. 오늘도 종일토록 이 노래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 순주 할머니도 지금은 진짜 파파 할머니가 되었겠구나 싶다. 나이 든다는 것은 그리운 것들이 많아지는 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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