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시간의 함수다
지아코모 페노키오(Giacomo Fenocchio)의 바롤로(Barolo)를 마셨다. 바롤로는 이태리 북부 피에몬테 지역에서 만드는 레드 와인이다. 바롤로는 마을 이름이기도 하고, 와인 이름이기도 하다. 오늘 마신 와인은 부시아(Bussia)라는 밭에서 생산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지아코모 페노키오는 1864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와인 메이커이다. 현재는 5대째인 클라우디오 페노키오(Claudio Fenocchio)가 와인을 만들고 있다.
바롤로를 만드는 와인메이커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전통적 방식을 고수하려는 부류와 새롭고 효율적인 현대적 방식을 도입하려는 부류이다. 마치 보수와 진보의 대립과 같다. 싸움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대립을 가리켜 '바롤로 전쟁'이라고까지 얘기한다.
지아코모 페노키오는 전통을 고수하는 쪽이다. 포도를 발효시켜 와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효모가 필요하다. 지아코모 페노키오는 인공적으로 배양한 효모를 쓰지 않는다. 그는 포도 껍질에 붙어 있는 효모만으로 40일에 걸쳐 천천히 발효시킨다.
그리고 와인을 숙성할 때, 오크(Oak) 통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3,500~5,000 리터의 대용량 슬로베니안 오크통(Slovenian Oak)을 사용한다. 대용량 오크통을 사용하면 와인이 오크통과 접촉하는 면적을 줄일 수 있다. 현대적 바롤로를 만드는 사람들이 225리터의 작은 프렌치 오크통(French Oak)을 쓰는 것과 대조적이다.
와인 숙성에서 오크통의 역할은 중요하다. 와인에 탄닌과 향을 더해준다. 그런데 과유불급의 진리가 오크 숙성에도 적용된다. 오크 터치가 과하면 마치 화장이 너무 진한 여인같다. 그래서 오크 터치가 강한 와인은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와인에서는 장미향이 났다. 빨간 꽃과 신선한 과일 그리고 동물적인 가죽 향도 느껴졌다. 전반적으로 탄닌(Tannin)이 강하고 산도도 높아 장기 숙성형 와인의 포텐셜이 느껴졌다. 장기 숙성형 와인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셔야 한다. 와인이 제대로 된 맛을 보여주는 시음 적기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보르도 1등급 와인 같은 경우는 시음 적기가 30~50년인 경우도 많다.
한 잔 두 잔 이 와인을 마시면서 점점 아쉬움이 들었다. 탄닌이 너무 강하고 전체적으로 밸런스도 아직 안 맞는다. 지금 마시기에는 너무 빠른 느낌이다. 최소 10년쯤 지나야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줄 것 같았다.
와인 마시는 즐거움이자 괴로움이 바로 이것이다. 와인은 시간의 함수이다. 한 와인이 자신만의 성장의 시간을 지나서 절정의 순간을 보여 줄 때 그 맛은 환상이고 예술이 된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괴로운 기다림이 필요하다.
예전에 가끔 들르던 와인바의 주인이 프랑스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프랑스에서는 대부분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자신이 평생 수집한 와인을 물려준다고 한다. 그래서 자식들은 10년이나 20년이 지난 와인들을 마신다. 그리고 본인이 사 모은 와인들은 다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는 것이다.
정말 부러운 얘기이다. 와인은 그렇게 마셔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현실성 없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오늘 내가 마신 바롤로도 앞으로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지금보다 몇 배 더 즐거움과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와인을 알면 알수록 즐거움이 커져가지만 이에 비례하여 괴로움도 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