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양 Jan 14. 2021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_이수은

출퇴근 지옥에 고단한 생활인을 위로하는 고전문학테라피

한 줄 정리

‘연애가 폭망했을 때’, ‘통장 잔고가 바닥일 때’,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불안하고 답답한 일상에 지친 당신이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독서 테라피’ 뒤표지에 적힌 소개문이 이렇게 와닿은 적이 있었나 싶다. 본질은 문학 안내서지만 고전에 관심이 없어도 책을 읽으며 당신의 마음 상태를 진단해볼 수 있다. 출판 편집자인 저자는 맞춤법에 이골이 났을 법한데 유행어 같은 요즘 말투를 적절히 활용하며 극강의 가독성을 실현했다.

주관적 감상

고전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책은 이미 차고 넘치고 범람한 책들이 바다를 이루는 데도 매년 새로 기획 출간된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고전은 그 자체로 훌륭한 독서감이지만 접근성이 현저히 낮다. 접근성이 낮다는 게 물리적으로 다가가기 어렵다는 얘기는 아니다. 국내 유수의 출판사에서 절로 손이 가는 예쁜 표지에 읽기 쉬운 현대어 번역까지 갖춰 셀렉션을 마련해 둔 데다가 동네 간이 도서관만 가도 대기 없이 빌릴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책을 들고 세월을 견뎌낸 명문을 건져보려 밑줄이나 몇 개 긋다 보면 어느새 졸음이란 악마의 손길이 고요하지만 고집스럽게 눈꺼풀을 끌어내린다. 우리에겐 이 악마를 물리칠 든든한 도우미가 필요하다.

둘째, 고전이 인정받고 사랑받는 이유는 작품 내부가 아니라 탁월한 범용성에 있다. 불후의 명작을 읽는 독자는 작품 자체에서 재미와 감동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도 갖지만 그보단 위대함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확인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고전의 가치는 시대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인용되고 응용되는 데 있다. 그러니 고전을 요즘 세태에 접목해 해석하는 안내서에 대한 수요는 언제나 생긴다. IMF 사태의 여파를 벗어나지 못했던 2000년식 고전 해석과 기후변화와 페미니즘을 말하는 2020년식 그것은 완전히 딴판일 수 있다.

세 번째 이유는 결이 조금 다르다. 독자가 아닌 저자 입장에서 접근성 높은 아이템이라는 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출판 기획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소재의 시의성과 주목도, 무엇보다 저자가 과연 해당 주제를 쓰기에 적합한 목소리인지 면밀히 따져야 한다.

인스타그램 시대의 대중 심리에 대한 학술서를 학위 하나 없는 사람이 쓰면 읽겠는가. 초보 북스타그래머의 처절한 생존 경쟁을 다룬 에세이 정도면 모를까(필자가 그런 걸 쓰고 있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과장해 말하면 누구나 쓸 수’도’ 있다. 다만 그게 의미 있는 책이 되려면 요소가 하나 더 필요하다. 영어로는 포인트, 우리말로 하면 방향성이다.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는 20년간 출판 편집자로 일했고 이전에 <숙련자를 위한 고전노트>를 쓴 경험이 있는 저자 이수은이 2020년의 대중을 정조준해 쓴 책이다. 목차만 살펴도 퇴근 후 자이언티 대신 꺼내먹을 수 있는 영양제 같은 책임을 알 수 있다. 1부 ‘마음만으로는 안되는 일’에는 ‘가슴속에 울분이 차오를 때는’. ‘사표 쓰기 전에 읽는 책’(!), ‘통장 잔고가 바닥이라면’, ‘왜 나만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가’, ‘용기가 필요합니까ㅡ세 가지 용기에 관하여’가 수록돼 있다. 각 장별로 주제에 어울리는 고전 두 세 편을 소개하며 줄거리와 감상 포인트를 짚어낸다.

위에서 일반론을 줄줄이 쏟아낸 이유를 이제야 밝힌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막힌 책이라 생각했고 그건 세 가지 이유를 모두 충족했기 때문이다. 세상일에 치여서 마음이 지칠 때, 그러니까 바로 지금 꺼내 읽으면 좋은 책이다.



밑줄 그은 문장


“카타리나의 냉혹한 살인 행위는 타고난 사이코패스의 성향 탓도 불가피한 환경적 요인 때문도 아니었다. 자기 목적의 실현에만 열중하는 타인들이 우연의 중첩에 불과한 사건을 악용해 나의 생애 전체를 욕보일 때, 그 야비와 모독에 맞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p.16)

“<마담 보바리>는 욕망의 내면을 정밀하게 묘사한 탁월한 연애 소설이지만, 금융과 소비 심리에 관한 준엄한 가르침을 주는 경제 소설이기도 하다. 빚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엠마의 연애는 악순환의 롤러코스터다. 빚은 합리적 사고를 마비시켜 욕망에 더 쉽게 굴복하게 만들고, 욕망은 충동적 소비를 낳는다.” (p. 34)

“카뮈의 <이방인>을 독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겠지만 나에게 이 작품은 ‘부모가 죽은 자식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p.150)
매거진의 이전글 경애의 마음_김금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