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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Jan 14. 2021

경애의 마음_김금희

김금희의 세련된 유머가 돋보이는 사회 소설

한 줄 정리


김금희 작가의 은근한 유머를 즐길 수 있는 장편소설. 과거와 현재의 비극이 교차하는 가운데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 어떻게 거리를 유지한 채로도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외적인 면


김금희 작가 특유의 따뜻한 시선과 무겁지 않은 문체 덕에 쉽게 몰입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화의 현실성이 일품이다. 최근 읽은 어느 소설보다 생생한 캐릭터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다. 주제 면에선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들을 차분히 언급하며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내적인 면


상수와 경애의 독특한 케미가 재미를 준다. 성격도 취향도 달라만 보이는 이들이 사실은 어릴 적 같은 친구와 각기 각별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으며 그런 경험에서 비롯한 내면의 공감대가 불쑥불쑥 비집고 나오는 때마다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환상적이기도 한 소통의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주관적 감상


1. <경애의 마음>의 백미는 유머다. 그리고 유머의 8할은 ‘상수’라는 남성 주인공 캐릭터에 빚진다. 이 작품은 세 개의 타임라인ㅡ애써 숨기고 살아가는 개인사(상수의 재수학원 시절과 경애의 파업 활동 과정)와 잊혀진 대중의 상처(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 그리고 잔인할 정도로 삭막한 회사 생활ㅡ이 교차하며 자본주의 말단에서 일어나는 여러 비극을 꼬집는데, 곳곳에 배치된 유머가 이런 비판에 현실감과 유기성을 부여한다.


상수는 소란을 피우는 슬랩스틱형 인물은 아니다. 재치와 냉소의 경계를 줄타기하는 재담꾼은 더욱 아니다. 상수가 웃긴 건 그저 어딘가 애매하고 쓸데없이 자잘해서다. ‘평균’보다 순진하고 어리숙해 보이는데, 그 이유는 평균보다 감성적이고 따뜻한 심성을 가져서다..


그는 미싱회사에 낙하산으로 입사한 기득권 출신이다. 그런데 국회의원 아버지와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지 상수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모른다. 우유부단한데 능력마저 안 되니 이도 저도 아닌 ‘팀장대리’로 자리만 보전한다. 그의 자잘함은 어찌 보면 귀엽다. 사무용품 신청서에 볼펜(흑색)이라고 쓰면 될 것을 ‘스테들러 삼각볼펜432’라고 상세히 주문하는 유일한 직원이다.


대놓고 웃기려는 유머가 아니라 캐릭터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생활 유머라 간은 안 센데 감칠맛은 있는 친구 엄마표 반찬처럼 서서히 하지만 깊숙이 빠져들었다. 상수의 치명적 매력은 ‘언.죄.다’에서 절정에 오른다. 언.죄.다란 ‘언니는 죄가 없다’의 준말로 상수가 남몰래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의 이름이다. 부캐 문화의 전신쯤으로 보면 된다. 셀 수 없는 로맨스 멜로 영화를 섬렵한 덕분에 연애에 통달한 언니라는 부캐를 장착한 상수는 말 못할 고민을 털어놓는 여성들의 사연에 공감하고 조언하며 불안한 정체성을 추스린다.



2. 유머를 먼저 언급했으나 웃으며 스트레스를 풀 만한 작품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유머가 있기에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비극에서 잠시 한숨 돌릴 수 있다는 거다. <경애의 마음>의 유머는 불편한 이야기에 끝까지 기울일 수 있게 해주는 자상한 가이드라고 생각한다.


어떤 비극인지 궁금하다면 일례로 경애가 파업 중에 노조 간부와 일부 직원에게 상습적으로 성희롱 당한 피해를 고발했고 그 사실이 언론에 공개돼 파업 활동이 물거품이 된 걸 말한다. 피해자인 경애는 위로를 받기는커녕 함께 일하고 투쟁했던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로 몰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상수는 경애의 이런 아픔을 알지도 못할 뿐더라 안다고 해도 품어줄 너른 가슴 같은 건 없는 사람이다. 다만 경애가 언죄다에 보낸 사연을 통해 전 남친과의 질질 늘어지는 연애에 가슴 아파하고 분노하고 어떻게든 그 아픔을 해결할 수 없을까 전전긍긍긍하는 사소한 사람이다.

상수의 위로는 경애의 근원적 상처를 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둘은 마음의 온도가 비슷하다는 걸 확인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위로한다. 나는 이 방식이 비교적 요즘의 것이고 세련되다고 느꼈다. 누구도 누군가의 아픔을 재단하고 평가해선 안 되는 시대다. 그 전에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 걸 원하는 사람은 없어진 지 오래니까.


3. 김금희 작가의 작품은 전작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었다. 표제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은 감상을 떠올려 보니 <경애의 마음>의 태도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작품 모두 위로의 시선을 건네지만 정면으로 마주 보는 건 아니다. 비스듬히 엇갈린 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약간의 안도를 느끼는 미지근한 온도. 모르긴 몰라도 내게는 딱 그 정도의 거리감이 적당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밑줄 그은 문장

“회사 사람들은 상수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은근히 괴롭히고 싶은 마음까지 참아내는 것은 아니었다. 종종 치사한 방식으로 그의 불안과 공포를 건드렸다. 그런 악취미들을 보고 있으면 유정은 인간의 다양한 얼굴만큼이나 그 나쁨도 그러데이션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회사의 방식은 뭐랄까, 좀더 능구렁이 같고 얄밉고, 차라리 노골적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러지는 않으면서 사람 진 빠지게 만드는 식이었다.”

“거기에는 먹고사는 일에 대한 지긋지긋함 같은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살겠다’라고 하는 일관된 당위가 있었기 때문에 그 태도는 무던함, 씩씩함과도 연관됐다. 경애는 언제나 어찌되었건 살자고 말하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렇게 말해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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