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잡한 초고가 부끄러운 당신을 기다리는 편지 한 통
한 줄 정리
‘대중의 작가’ 앤 라모트가 비장의 작업 스킬과 내밀한 경험담을 압축해 내공을 전수한다. ‘출판 작가’를 꿈꾸는 지망생에겐 훌륭한 실용서가, 소설가의 속사정이 궁금했던 이에겐 문학적인 인터뷰가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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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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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작가가 국내에 소개되는 경로는 여러 가지다. 열정적인 독자라면 아마존 베스트셀러나 ‘퍼블리셔스 위클리’, ‘커커스 리뷰’ 같은 서평매체에서 해외 출판 유행을 손쉽게 알 수 있다. 방금 손쉽다고 했던가? 정정한다. 인터넷이 없던 과거와 비교해 접근성이 높아졌다는 얘기지 솔직히 영어로 정보를 얻는 건 피곤하고 시간이 곱절로 드는 중노동이다. 사정이 이러니 우리는 자연스레 국내 출판사와 일간지가 소개하는 작품에 주목하게 된다. 그마저도 전부 소화할 여력이 안 된다. 유발 하라리와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전능한(mighty)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불패신화를 써 내려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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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조금은 아쉬운 출판 수입 환경에 새길을 개척한 이가 있었으니 소설가 김영하다. 정확히는 알 만한 사람은 다들 구독을 눌렀다는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이 미지의 부크로드(book road)를 개척했다. 김영하의 중후하면서도 스마트한 목소리는 대중에겐 생소한ㅡ국내 번역 출간됐으나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ㅡ책들을 소개했고 우리의 책장을 한층 다채롭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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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bird by bird)>(1994)은 김영하가 밀리의 서재 오디오북에서 발췌 낭독해 알게 된 책이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라모트의 삶을 그린 <bird by bird with anne>(1999)라는 다큐멘터리도 있다는데 이제야 알았다니 세상엔 책이 많아도 너무 많다. 소설과 에세이를 주로 썼고 이 책은 다큐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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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봤다면 작가 지망생을 유혹하는 양산형 글쓰기 안내서로 치부하고 지나쳤을 법한 평범한 제목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숨겨진 금은보화를 발견한 기분까지 들었다. 책을 펼칠 때 품었던 두 가지 기대 모두를 충분히 채워줬기 때문이다. 이른바 작법서를 집어 든 이들은 무엇보다 실용적인 스킬을 건지길 원하고 덤으로 유명 작가의 내밀한 작업 루틴까지 엿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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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모트가 제시한 스킬은 정말로 실용적이다. ‘짧은 글 한 편 쓰기’, ‘조잡한 초고 쓰기’, ‘2.5cm 사진틀’ 등의 방법론이 처방전에 적혀있다. 곧바로 실행에 옮기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첫 줄을 미처 못 쓰고 다리를 떨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침대에 다이빙했던 내가 마침내 첫 문단을 썼다. 게다가 일단 타이핑을 시작하니 종이가 모자를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방금 전 문장을 아무리 고쳐도 광신도의 간증 같지만 달리 도리가 없다. 다만 나처럼 할 말은 많은데 고작 종이 한 겹 두께의 두려움에 가로막혀 답답했던 이들은 비슷한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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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막상 완독하고 나니 처방전과 함께 건네준 권고사항 즉, 작가의 경험담이 더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라모트는 누가 봐도 잘나가는 작가인데 매번 새 작품을 쓸 때마다 엄청난 편집증과 폭식증에 시달리며 10분 간격으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한다고 한다. 일단 내 이름 박힌 책을 한 권만 출간하면 인생이 완전히 바뀔 거라 확신하는 지망생 중 한 명인 나에게 절망적인 뉴스다. 하지만 동시에 작가는 “예술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면서도, 동시에 스스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희귀한 노동 계층의 사람”이라며 “세상과 접촉하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았고, 사회에 기여할 마음도 없었고, 그냥 혼자만의 일에 전념하던 무렵의 당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라모트는 말한다.
밑줄 그은 문장
"당신이 글로 써야 하는 것은 자신만의 감수성인데 이는 당신만이 가질 수 있는 남다른 유머 감각이나 내면의 느낌이나 의미 같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노래를 선택해서 부를 수 있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십억가지의 다른 노래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괴물을 약간이나마 바깥에 꺼내 놓으면 그제야 우리 모두 똑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자 인간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드러내는 행위에 따라오는 것은 낙인이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글쓰기는 고도의 세련미와 천진난만함의 결합이 필요하다. 그것은 정의가 아름답다는 믿음과 양심을 요구한다. 위대한 작품이 되기 위해서 예술은 어딘가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더 이상 순진한 양심에 익숙하지 않다면 당신이 작가가 될 이유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