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책사이의 네트워크를 파악하고 각각의 좌표를 세우기
1. 4월이 꺾였다. 수북한 책 무덤이 눈에 밟혀 한숨을 내쉰다. 표지라도 들춰봤으면 다행이지. 지금 막 인쇄된 듯 빳빳한 책들엔 눈길도 주지 마라. 그래야 알량한 자존감이나마 지킨다. 새해 세운 독서 플랜이 폐허가 된 지금 필요한 건 초심으로의 회귀다. 이름하여 나만의 베스트북. 거실 책장 가운뎃줄 잘 보이는 곳에 정돈된 콜렉션에서 한 권을 뽑았다. 뉴비든 고였든 독서인의 지병 같은 죄책감을 덜어주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소개한다.
읽지 ‘않은’ 책이라니, 이 표현부터 틀렸다. 읽지 ‘못한’ 책이겠지. 그것도 모자라 감히 거기에 말을 보태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아주 도발적이군. 장사 좀 아는 사람이야. 하지만 열어보면 다르겠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말합니까? 여러분 진심이에요?’ 이러겠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독서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전혀 접해보지 못한 책(unknown book), 대충 뒤적거려 본 책(skimmed book),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책(heard book), 읽었지만 내용을 잊어버린 책(forgotten book)이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위의 목록엔 ‘읽은 책’이 없다. 저자는 어떤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불완전해서 우리가 정말로 읽은 책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의 책에 대해 대화를 하다 보면 과연 상대와 내가 같은 책을 읽었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 독서라는 개념 자체를 재고해야 하는 이유다.
2. 이쯤에서 저자 얘기를 해야겠다.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파리 8대학의 불문학 교수라고 한다. 독서와 저술이 직업인 사람이 당당히도 자신의 비독서를 고백하니 당황스럽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처지이기에 사실 나는 이런저런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책들은 대부분 내가 펼쳐보지도 않은 책들이다.” 바야르가 양심고백까지 하고 나선 이유는 완벽한 독서에 대한 강박을 날려버리기 위해서라고 본다.
독서를 신성시하는 전통은 역설적으로 책 읽기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책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독서가 자꾸만 미루고 싶은 숙제가 되는 것이다. 바야르의 주장에는 그런 부담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통쾌함이 있다. 책은 도구일 뿐이다. 진정 중요한 건 책을 이용해 활발히 대화하고 자기만의 생각 체계를 튼튼하게 가꾸는 거다.
바야르에 따르면 독서의 목적은 책의 세부 내용을 습득하는 게 아니다. 책과 책, 책과 독자 사이의 네트워크를 파악하고 각각의 좌표를 세우는 일이다. 그는 그런 능력을 ‘총체적 시각’이라고 부른다. 뜬금없는 주장은 아니다. 같은 프랑스 출신 문학평론가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 이론’과 맞닿아 있다. ‘텍스트’란 ‘작품’을 대체하는 개념으로, 작품이 해독돼야 할 퍼즐이라면 텍스트는 무궁무진한 해석의 대상이다.
3. 어찌 보면 뻔한 얘기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권위 있는 문학 교수가 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누구보다 문학의 고귀함을 옹호할 것 같은 사람이 ‘문학 그까이꺼 별거 아니야’라고 쿨하게 내려놓는 모양새기 때문이다. 바야르는 문학과 평론의 허위를 깨부수고 생활의 영역으로 끌어내린다. 프랑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신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면서 이 작품의 가치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문제없이 읽힐 수 있다”는 것에 있다고 단언한다.
바야르의 주장 덕에 나는 독서를 한결 더 마음 편히 즐긴다. 하지만 짚고 갈 부분도 있다. 바야르가 말하는 ‘총체적 시각’의 수준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프루스트 문학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아무 페이지나 펼친다고 훌륭함을 느낄 수 있을까. 바야르는 이미 훌륭한 내면의 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결국, 바야르가 권유하는 건 비판적인 독서다. 책과 작가 앞에 너무 겸손해지지 말 것, 눈과 귀를 열고 당당하게 사고하고 토론할 것, 세상을 떠도는 무수한 말들을 무조건 수용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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