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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Jul 25. 2022

헤어질 결심

떠날 결심


0. 소설이 안 써지므로 소설 같은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다. 다들 보셨죠? <헤어질 결심>.


1. 박해일과 하정우가 서로의 역할을 바꿨으면 어땠을까. <아가씨>에서 하정우는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아주 정확하고 나쁜 쪽의 예시를 훌륭히 연기했다. 세상 만사를 다 안다고 착각하고 그 범주엔 인간도 포함된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잘 익은 복숭아를 깨물며 과시하는 야만적이고 저돌적인 에너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의 장난기 어린 눈빛과 맞물려 흘러간 유행 같은 남성성을 효과적으로 희화화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정우여서 가능했을까. 박해일에게 같은 역할을 맡기려면 어떤 수정을 가해야 할까. 나는 이러한 착상이 박찬욱이 이 영화를 구상하는 데 일조했다고 감히 예상해 본다. (박찬욱은 두 주연을 캐스팅한 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박해일은 어떤 남자일까. 예의 바르고 점잖은, 깔끔하고 산뜻한 같은 온갖 수사를 한몸에 담은, 한마디로 품위 있는 박해일은 ‘남자’라는 고정관념을 넘어설 수 있을까. 그 실패담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필름 누아르와 정통 멜로 같은 용어가 이 영화를 맨 앞에서 설명하는 수식어임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이 영화를 ‘아가씨2’로 바라보면 어떨지 궁금할 뿐이다.


2. decision to leave, 헤어질 결심. 처음에 박찬욱의 차기작 제목이 ‘헤어질 결심’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참으로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헤어지다, 결심. 모두 익숙한 단어인데 왜 그랬을까.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짐작한다. 왜냐하면 이 조어는 놀랍게도 번역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라. 나 걔랑 헤어질 거야, 라는 사람은 있어도 나 걔랑 헤어질 결심을 했어, 라고 말하는 사람은 당신의 주변에 없다는 것을. 아니 또 모른다. 서래(탕웨이)처럼 외국에서 온 친구가 있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 마침내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하였어. 그러므로 이 영화의 원제는 통상의 한국영화와 달리 영어로 먼저 쓰였고 한국어로 번역됐다고 볼 수도 있다. leave는 헤어지다라는 뜻도 갖지만 우리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번역어는 떠나다, 이다. 헤어질 결심은 누구와? 라고 묻게 하지만 떠날 결심은 어디로부터?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다.


3. 해준을 끝내 짙은 안개 속에 가둔, 일편단심으로 자신을 바라보느라 온갖 고초를 겪은 서래와의 관계를 허망하게 흘려보내게 한 함정은 바로 ‘똑바로 보고 있다’는 그의 착각이다. 그가 서래에게 자신과 비슷한 것 같다고 애정을 드러낼 때 그가 짚는 건 둘이 공통적으로 똑바로 본다는 점이다. 적어도 가감 없이 보려 하는,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에서 정안(이정현)—이는 분명 안정을 거꾸로 뒤집은 말이다—이 주는 안정감과는 다른 유대감을 느낀다. 형사인 해준은 끔찍한 살인 현장도 똑바로 봐야 하고 온갖 거짓말을 일삼는 피의자도 똑바로 봐야 한다. 그런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안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대담하고 냉철한 서래를 만나고서 그는 비로소 불면증에서 벗어나고 자기 자신으로서 편안하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정안의 이름이 뒤집힌 건 겉으로만 그럴싸한 허울뿐인 안정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똑바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중요한 그에게 이는  독이 된다. 서래가 극악한 범죄자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고 형사로서의 직감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린 그는 자신이 서래와의 사랑 때문에 눈이 흐려졌다고 단정하기 시작한다. 똑바로 봐야 하는데, 형사가 이러면  되는데. 의심이 확신을 강화하는 굴레에 빠진 그는 서래의 모든 말과 행동을 거짓으로 치부하고 마침내 자신이 붕괴됐다고 느낀다. 그런데  말은 서래에겐 사랑한다는 말로 들린다. 누군가로 인해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해준은 서래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착각 때문에 사랑에 빠졌지만 그게 오히려 내면에 재앙을 부를 수도 있음을 깨달았을  자기 자신을 '떠나는' 대신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자신을 버려야 사랑에 이를  있다는 명제가 헤어져야 한다는 명령으로 잘못 해석된다. 영화 속에서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보여주는 젠틀함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역시도 하정우가 빠졌던 착각의 늪을 벗어나지 못해 자신과 사랑 모두를 잃은  평생을 헤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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