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페인, 바튼 아카데미

외로움도 그대와 함께라면 따듯할 수 있음에

by 도연호

겨울이 되면 저는 집에 들어앉아서 이불을 덮고 귤을 까먹으며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꽤 자주 듭니다. 이때 떠오르는 영화들은 대부분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보는 <해리포터 마법사의 돌>이나 <나홀로집에>도 물론 떠오르지만 저는 <소울>, <월플라워> 그리고 이 작품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물론 제가 미국인이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추운 겨울에 은은히 타오르는 모닥불같은 독특한 감동과 향수를 가져다주는 영화같아요. 비록 영화의 줄거리는 평이하고 단순하다고 해도, 따듯한 연출과 배우진들의 열연 그리고 감정을 담고 있는 일상의 담담한 대화들과 행동들이 이 영화를 다른 크리스마스 영화들과 차별화된 매력을 가진 영화로 만들어 주니까요.




상실


영화의 주인공은 폴과 앵거스, 메리입니다. 셋은 각자의 이유로 학기가 끝나고 사립학교에 남게 되어 함께 겨울을 보내게 됩니다. 일종의 크리스마스 가족 영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내용과 화면 구성, 색감과는 정반대로 세 주인공들은 가족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친절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공격적인 언행과 태도를 표출하죠. 따라서 관객들은 영화 초반부 그들에게 공감대를 많이 느끼지 못합니다. 열등생 앵거스는 테디에게 고아라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하고요. 패드립을 달고 삽니다. 엄연히 선생님인 폴의 한쪽눈이 의안인 것을 스스럼없이 지적하며 어느 쪽 눈이 의안이냐는 모욕적인 질문도 던집니다.


폴도 마찬가지죠. 저도 대학생이지만 저런 교수가 있었다면 아마 학생들에게 욕을 오지게 얻어먹었을겁니다. 성적 기준이 필요 이상으로 엄격하고 기말고사가 끝나는데도 진도를 나가는 점뿐만 아니라 최소 일분에 한번씩은 학생의 지능을 모욕합니다. 이간질까지 합니다. 폴 지아마티의 엄청난 연기력에 힘입어 저는 그를 볼때마다 혐오감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리는 그나마 덜하지만 차가운 태도만큼은 위의 두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영화가 지나며 근거를 갖습니다. 어쩌면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주인공들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맥거핀에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는 그들에게 이입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부족한 것을 근거로 욕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죠. 앵거스의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계십니다. 어머니는 새 아빠와 여행을 떠나죠. 그것이 그가 학기가 끝나고도 학교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바튼 아카데미>의 전개가 특별한 것은 앵거스가 겪은 일련의 상실들은 반전도 커다란 사건도 아닌 듯이 연출된다는 점입니다. 그저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죠. 카메라 구도부터 음악까지 하나도 오프닝의 성가대가 부르는 잔잔한 음악과 정석적인 구도를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한번에 공개되지도 않아서 분절분절 띄엄띄엄 드러나는 느낌입니다. 잠깐 한눈 팔면 다 놓치는 디테일들에 가까워요.


폴은 멍청했습니다. 그는 동료가 자신의 논문을 표절하는 만행을 저질러도 막지 못했죠. 오히려 그는 논문을 표절했다는 죄까지 잘못 뒤집어쓰고 바튼 아카데미로 오게 되었습니다. 메리는 아들을 베트남 전쟁에서 잃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남긴 구멍을 가지고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학기가 끝나도 학교에 남습니다.




거짓말


하지만 그들에게는 나름의 따듯함과 신념이 남아 있습니다. 앵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아직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폴은 절대로 부정한 행위나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방패들 너머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폴은 앵거스와 함께 그의 아버지를 만나고, 그의 어머니가 그와 함께 가주지 않았던 보스턴을 방문하면서 앵거스의 상처들을 알게 됩니다. 앵거스는 폴이 자신의 동창에게 거짓말을 하는 장면을 보고 그의 논문이 표절되었고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다는 것까지 알게 되지요.


그래서 그들이 서로의 상실들을 내보이는 과정 자체는 또다른 감동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폴은 앵거스가 스스로의 상처들을 고백하기 이전에 이미 그의 흉터를 보았습니다. 이제 앵거스는 무방비한 상태지만 폴은 이전처럼 가시를 세우지 않지요. 폴은 앵거스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죄를 뒤집어 씁니다. 결국 그는 해고되고 말지요. 그가 해고되고 방을 나오면서 앵거스에게 한 대사는 정말 좋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안을 똑바로 가리키며 이쪽 눈이 가짜야라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앵거스는 이미 알고 있지요. 그럼에도 폴은 목놓아 소리치고 앵거스는 토를 달지 않습니다.




This year, to save me from tears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도 재미있었습니다. 오프닝은 유니버설 픽처스의 로고가 뜨며 시작되는데요. 로고가 옛날 로고입니다. 그리고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전환되고요.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화면은 다시 이리저리 전환됩니다. 눈 덮인 마을과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전경이죠. 엔딩에서는 해고된 폴이 차에 타서 입을 양주로 헹굽니다. 그대로 창문을 열어 밖에 행주를 뱉고는 차를 타고 눈덮인 도로를 가로지르는 폴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폴과 앵거스는 자신의 억울함과 괴로움을 실질적으로는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폴은 다시 한번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학교에서 쫒겨났고 앵거스는 계속 새아빠와 엄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겠죠. 그들은 계속 눈 덮인 마을과 도로 위를 걸어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저도 모르겠고 표현도 못하겠으나 무엇 때문에 달라졌는지 영화는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폴이 다시 한번 죄를 뒤집어 쓴 것은 처음에 죄를 뒤집어 쓴 것과는 다릅니다. 두번째는 자발적이었구요. 또 앵거스가 퇴학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그는 앵거스가 자신과 같은 억울함을 겪지 않게 하는 선택을 함으로서 달라졌습니다. 어쩌면 그는 앵거스뿐만 아니라 그 행위로 스스로를 구원했을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했을뿐만 아니라 미래에 새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오프닝이 과거의 로고를 차용했다는 말도 했었는데요. 이는 시대적인 요소를 반영하기 위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튼 아카데미는 시대적 현실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또 특별합니다. 부자들의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니까요. 마치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그랬듯이 <바튼 아카데미>는 베트남 징집과 부유한 이들이 필요 이상의 부당한 권리를 누리게 되는 시대 현실, 그럼에도 소외된 이들을 돌보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를 간접적으로 후비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너무 진지한 부분만 이야기했는데, 이 영화 웃긴 영화입니다. 아직도 앵거스가 혼자 공중제비를 돌다 팔이 아작이 나버리는 장면이 기억이 나요.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디졸브가 정말 잘 활용된 영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잔잔한 여운을 남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어요. 크리스마스에 특별한 영화를 보고 싶어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따듯하지만 씁쓸하고, 주연들의 열연과 대사의 맛이 살아있는 크리스마스 영화.


알렉산더 페인의 <바튼 아카데미>입니다.




평점 4/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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