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버닝

시퍼런봄

by 도연호

오늘 가져온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입니다. 아마 보신 분들이 꽤 많으실 것 같아요. 그리고 대부분의 관객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조금 당황스럽거나 한번에 이해가 안 가셨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아님 말구요. 아무튼 저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이해가 완전히 덜 되었는데도 위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기생충>만큼이나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힘들었던 점도 있었습니다.영화가 내용이 많지 않은데도 밀도가 지나치게 높고 정보량과 비유 그리고 상징이 말도 안되게 많아서 생각하면 할수록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두번을 보았는데요. 아직도 괴롭습니다.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던 부분들과 중요한 부분들을 모아서 해석해보려고 합니다. 아마 아주 복잡하고 긴 글이 될 것 같아 벌써부터 기분이 좋군요. <버닝>이라는 영화가 기본적으로 수많은 질문과 수수께끼를 던지는 영화이기에 저도 그 질문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겠습니다. 영화의 오프닝을 보시면 하얀 트럭의 뒷문을 비춥니다. 트럭의 잠긴 부분을 오래 비추다 측면에 연기가 피어오르죠. 종수가 걸어나옵니다. 그래서 <버닝>은 종수의 시점에서 세상이라는 잠긴 수수께끼를 열어젖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해석해야한다고 믿습니다.




부존재와 비존재


일단 먼저 이야기 해보아야할 주제는 <버닝>은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양하겠지만 저는 세가지 주제로 요약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세가지 주제는 단 하나의 단어. 그러니까 청춘을 인수분해한 결과라고 믿습니다. 종수와 해미 벤이라는 세 명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가지 주제 가운데 하나는 부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라고 물으신다면 여러 메타포가 그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미의 마임을 보실까요. 해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귤이 있다고 상상하지 말고 귤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만 한다면 귤을 언제든지 까먹을 수도 있다고요. 이어서 해미는 자신의 보일이라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종수를 집에 부릅니다. 종수는 고양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내가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되는 건가?라고 말합니다. 벤이 해미의 손금을 봐주는 과정에서 등장한 돌도 같은 맥락입니다. 왜 이창동 감독이 청춘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는지를 생각해보면, 청춘이 정해지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저에게는 가장 이상적입니다. 부존재의 상태에 위치한 청춘들은 존재의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요. 그래서 양자역학을 영화와 연결짓는 분들도 많은데요. 제가 양자역학을 직접 배운 입장에서 이 이상으로 양자역학을 해석에 끌어들이는 것은 제 느낌에는 사실 불필요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오히려 철학적인 물음에 가깝다고 여겨졌어요.


벤이 등장하면 이 물음은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해미가 울면서 말합니다. 아프리카의 노을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사라지고 싶었다고. 죽는 건 너무 무섭고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었다고. 그러니까 현재 부존재하는 해미는 존재에서 비존재로 향하고 싶어합니다. 벤은 이상한 답변을 합니다. 자신은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 해미의 우는 모습이 신기하다고 말하죠. 종수는 어이가 없었는지 그래도 슬픔을 느끼긴 하실 것 아니에요?라고 묻습니다. 벤은 눈물이라는 증거가 없으니 확인할 수 없다고 말하죠. 벤의 감정들은 현재 비존재합니다. 벤은 비존재에서 존재로 나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어해요. 가슴의 베이스를 느끼고 싶어하죠.


그리고 해미는 진짜로 사라집니다. 정말로 그녀가 사라지고 나면 추가적인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들어옵니다. 해미의 우물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벤이 비닐하우스를 정말 태웠는지에 대한 질문이죠. 종수는 아침의 안개에 둘러싸인 마을을 땀에 젖도록 뛰어다니며 우물의 존재를 확인하려 합니다. 해미는 어디로 왜 사라졌을까?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도 함께요. 두 가지 가능성이 제시됩니다. 하나는 벤이 해미를 살해했다는 가능성이죠. 그의 서랍에 놓인 해미의 시계. 벤의 비닐하우스가 사람을 비유하는 메타포일 가능성이 그의 새로운 연인을 통해 제시됩니다. 다른 가능성은 해미가 카드빛 때문에 도망쳐 버렸다는 현실적인 가능성입니다.


이제 존재와 비존재는 종수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이 명확해집니다. 종수는 해미를 사랑합니다. 그가 벤의 집에서 새로운 고양이를 발견한 순간 그는 그 고양이가 보일이라고 믿기로 합니다. 소설가인 종수는 해미가 카드빛 때문에 도망쳐 버린 결말보다는 벤이 해미를 살해했다는 결말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벤을 살해하며 스스로의 결말을 매듭짓지요.


종수가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내리려 애쓰는 과정은 몸부림치는 청춘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그리고 그 답이 이토록 참혹한 결말로 제시된 데에는 이창동 감독의 청춘에 대한 연민과 비관이 스며들어있다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들끓는 청춘들의 분노가 지금의 청춘들에게는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정신적 결핍과 물질적 결핍


여러분들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커갈수록 꿈이 변질되고 훼손되는 것을 가슴 깊이 느낍니다. 그리고 꿈이 변질되는 것은 늦을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너무 빨라요. 꿈을 해적왕보다는 회사원으로 적어내는 나이가 날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습니다. 제 사촌동생의 졸업식에서 저는 두 눈으로 이를 직접 확인했지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꿈은 더이상 추상적이지 않고 물질적입니다.


해미의 집에 들어섰을 때, 해미는 집이 북향이라 하루에 한번, 미세한 빛이 남산타워에서 반사되어 들어온다고 말합니다. 종수는 해미와 사랑을 나누며 이 빛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기괴한 장면이 등장하죠. 해미가 아프리카로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해미의 집에 홀로 남아있는 종수는 남산 타워를 바라보며 자위를 합니다. 벽에는 해미의 사진이 붙어있지요. 그리고 후반부에 버스에서 내린 종수는 높은 빌딩을 바라봅니다. 빌딩의 꼭대기에서 벤은 러닝머신 위를 뛰고 있죠.


이것도 메타포입니다. 빛이 청춘의 꿈이라고 가정해보지요. 이제 그 빛은 남산타워에 반사됩니다. 해미는 빛이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두번 왜곡된 빛을 꿈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종수는 남산타워의 빛 그러니까 자본주의에 한번 왜곡된 빛을 꿈이라고 착각하고 있지요. 그가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자위하는 것과 벤에게 묘한 질투심을 보이는 것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해미와 종수는 물질적으로 결핍되어 있고 그래서 무력합니다. 종수는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권리와 권력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이를 동경하지요.


벤은 반대입니다. 그는 물질적으로는 포르쉐를 타고 다닐 정도로 부유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으로 결핍되어 있지요. 뭘해도 재미있지가 않은 그는 대마초를 하면서도 별 웃음을 짓지 않습니다. 그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일로 정신적 결핍을 채운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실제로 무엇으로 결핍을 채우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는 하지요. 종수가 그를 칼로 수차례 내리친 순간에 말입니다.


대남 방송이 들려오는 평화로운 농촌인 파주에 종수가 사는 것과 조용하고 부유하지만 비교가 만연하고 치열한 강남에 벤이 사는 것도 의미심장한 요소입니다. 특히 대남방송이 조명된 직후 아침에 종수의 방에는 티비가 켜져 있는데 트럼프가 큰 소리로 정책을 발표하고 있지요. 감독의 정치적 성향까지 고려해 본다면 그가 지나친 물질만능주의를 경계하고 있음은 명확합니다.




기성세대


감독은 현시대의 청춘들이 어그러진 이유를 그들에게서만 찾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조금 놀란 부분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이창동 감독 스스로가 기성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와 현세태를 비판하기 위한 영화는 여럿 있어왔지만 제가 느끼기에 감독 스스로가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세대를 질타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버닝>은 두가지 이야기가 병립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해미와 종수, 벤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수의 아버지 재판 이야기이죠. 그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종수는 말합니다. 어머니는 도망가고 없지요. 그는 종수에게 어머니의 옷을 태우라고 시켰습니다. 종수의 본가에는 의문의 전화가 자꾸 걸려오는데요. 종수는 참다참다 전화를 걸었으면 말씀을 하셔야죠라고 울분을 토합니다. 종수가 다음날 공을 벽에 튀기는 장면에서 벽에 걸린 아버지와의 사진을 조망하는 것을 보면 그는 아버지가 전화했다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재판에 지속적으로 참석하고 탄원서까지 적으려는 종수를 보면 그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곁에 없습니다.


한편 저는 변호사와 종수의 대화도 인상적이었어요. 대화를 보면 일상적이면서도 기분 나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지속적인 정답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묘하게 평가하지요. 마지막으로 듣지를 않습니다. 이 세가지 요소는 비단 이 대화뿐 아니라 주요인물들의 대화에서도 수차례 반복되는 부분이지요. 당장 해미가 노을에 대해 말할 때 벤은 생뚱맞게 자신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종수는 벤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할때 묘한 비웃음을 짓고, 벤은 종수의 차에서 무례하게 큰 소리로 대화합니다.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타 있는 것은 덤이죠.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 있는 행동들을 이창동 감독은 섬세한 눈으로 포착하여 이를 청춘들과 더 나아가 사회가 일그러진 이유들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수의 아버지 재판을 보시면 이창동 감독이 기성세대를 얼마나 비판적으로 응시하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종수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이야기와 묘하게 결말이 겹칩니다. 혼자 생활하고 끝에는 온갖 분노를 폭발시켜 종수는 살인, 아버지는 징역이라는 결말로 이어지는 것까지요. 사랑하는 이가 도망가는 것도 똑같습니다. 종수가 어머니와 만나는 장면에서 어머니는 해미가 입었던 진한 핑크색 옷을 입고 있지요. 기성세대의 분노와 잘못된 문화가 아래로 아래로 대물림되는 것입니다.




버닝


결국 길을 잃은 청춘들의 분노는 불길과 파멸로 이어지는 것이 <버닝>의 결말입니다. 그렇다면 청춘들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버닝>은 그저 청춘과 현세태를 비판하고 있는 영화일 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감독은 그레이트 헝거를 해답으로 제시합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삶을 즐기며 춤을 추듯이 나아가는 형태가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미가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는 장면이 작품의 하이라이트이자 클라이막스가 될 수 밖에 없지요. 서로 다른 고민을 겪고 있는 세 명의 청춘이 함께 노을을 응시하는 아름다운 장면이기도 했구요. 그리고 그레이트 헝거의 추구에는 무관심 혹은 비웃음의 눈초리만 가득한 사회에 해미는 눈물을 흘리지만 이 역시도 바뀔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던 종수가 비록 파멸을 맞았지만 비로소 써야할 소설의 주제만은 찾았듯이요.




부스러기들


몇가지를 더 이야기하자면 먼저 언급되는 윌리엄 포크너는 사회 비판 소설을 의식의 흐름 형태로, 모자란 주인공을 내세워 쓴 작가입니다. 그래서 종수는 윌리엄 포크너 소설의 주인공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한 것이지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서 소설의 주제를 못정했다는 대사는 루이자 메이 올컷이 말한 삶이 괴로워 즐거운 소설을 쓰기로 했다는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언어 유희도 상당히 많이 등장했어요. 감독이 소설가라 그런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벤은 종수의 집에 지포라이터를 두고 갑니다. 벤은 종수를 라이터라고 지칭합니다. 벤이 종수의 소설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하지요. 해미는 종수에게 작가 이종수라고 묘하게 작가의 된소리를 살린 발음을 냅니다. 종수는 해미가 마임을 배운다는 이야기에 배우하려고 그러냐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고양이 보일은 결말부 버닝의 직접적인 계기입니다. 진짜 마지막으로 리처드 싱클레이터 감독의 영화에 대해 썼을 때 시간의 혈관이 만져진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A4 용지의 비어있는 여백이 느껴지는 것 같은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청춘의 부존재 상태에 놓여있는 저에게는 <버닝>이 더 공감되었던 영화이기도 했었구요.


방황하는 청춘을 다양한 메타포를 통해 바라본 영화.


이창동 감독의 <버닝>입니다.




평점 5/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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