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가 도로시에게, 그럼에도 난 너야.
오늘은 제가 아주 좋아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대니와 엘리>는 정말 잘 알려지지 않은 넷플릭스 영화 가운데 하나인데요. 워낙 넷플릭스 초창기 오리지널 콘텐츠 가운데 하나라 더 그런 것도 있는 것 같구요. 하지만 제가 보았을 때는 굉장히 훌륭한 영화입니다. 로튼토마토 지수도 95%를 찍고 있구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가운데 하나에요. 원래는 아무도 모르는 영화이고 볼 사람도 없을 것 같아서 이 영화에 대해 쓰기를 주저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개인의 행복을 위해 쓰고 싶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이 보통 다 보고 나면 기분은 좋지만 생각할 거리는 없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기도 했구요. <화양연화>나 <이터널 션샤인>같은 여타 걸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뛰어나긴 해요.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기술적으로도 훌륭하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독의 시선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응시하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서요.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좋아하는데 질려서 새로운 감각을 찾고 있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일단 아무도 안 보셨을테니까 줄거리 설명을 약간 드리면요. 대니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엘리라는 여자가 있구요. 둘은 돈이 급합니다. 따라서 가방을 전달하는 불법적인 일에 자연스럽게 얽히게 되구요. 일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담은 것이 <대니와 엘리>라는 영화의 골자입니다. 그리고 줄거리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 영화는 순수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아니고 범죄 영화이기도 하고 로드무비의 형식도 일부 띠고 있습니다.
로맨스 영화는 다른 장르보다도 주연 둘의 매력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드라마들을 봐도 내용보다는 예쁘고 매력적인 캐릭터와 배우의 마스크가 흥행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많아요. 그러나 <대니와 엘리>의 주연들의 매력은 조금 독특합니다. 일단 배우의 마스크가 아주 잘생기고 예쁘지는 않습니다. 분명 매력적이기는 하지만요. 그리고 그들의 삶은 비루하고 하찮습니다. 대니는 동네 이탈리아 샌드위치 가게의 점원이구요. 엘리는 스트리퍼인데 그마저도 해고당해서 직장이 없습니다. 어찌나 비참한지 엘리는 등장하는 첫장면부터 지하철 탈 돈도 없어 교통카드를 대신 찍어달라고 부탁하지만 냉랭한 뉴욕 시민들은 무시하고 엘리는 결국 몰래 안전바를 뛰어넘습니다. 로맨스 영화 여주인공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손으로 이 닦는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둘은 시시때때로 범법 행위도 저지르는데 이게 또 스케일이 작은데 귀엽지는 않은 범죄들을 저질러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랑한다는 대사가 아예 안 나옵니다. 그 비스무리한 좋아한다는 말도 안 나와요. 스킨십과 키스신도 있긴 한데 이게 있는건지 없는건지 모를 정도입니다. 심지어 감독은 영화의 음악 부문에 힙합을 선정하고야 말았습니다. 클래식 음악보다 더한 선택이죠.
그런데도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다른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간지러움과 온기를 느꼈습니다. 생각을 해보니까 한 두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하나는 대사가 매우매우 뛰어납니다. 이게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이런 대사가 있었어요. 엘리에게 매력을 느낀 대니가 직업을 묻는데 엘리는 대니를 속이고 바텐더라고 대답합니다. 반대로 엘리가 직업을 묻자 대니도 엘리를 속이고 자기는 셰프라고 대답하죠. 서로의 행실과 비루한 행색을 이미 본 그들이 서로에게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하고 나자 둘은 자책이 들었는지 바로 다시 직업을 정정합니다. 대니는 스트리퍼라는 엘리의 직업을 듣고 많이 당황했고 인기가 많았을 것 같다는 실언을 해버리죠. 엘리는 부끄럽고 심통도 나서 내가 아무데서나 노는 여자같냐며 자기가 몇명이랑 잔 것 같냐고 비꼬듯이 질문을 하고 대니는 대답을 회피합니다. 엘리가 일곱 명이라고 쏘아붙이며 별로 많지도 않았다고 말하니 대니는 엘리에게 너가 백명이랑 잤더래도 난 그런 생각 안했을거라고 이야기합니다. 막상 쓰고 보니까 별 거 아닌데요. 이런 식의 미묘한 대화들이 계속 이어지며 사람 마음을 간질거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어요.
두번째는 연출입니다. 대니와 엘리가 기차를 탄 장면에서 대니가 계속해서 엘리만 바라보다 눈을 내리는데요. 대니가 눈을 내리는 순간 엘리는 대니를 쳐다보죠. 대니가 가방을 가져가버린 여자를 감시하는 동안 고용자에게 단 한순간도 그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감시했어요라고 보고하는데 직후의 장면에서 대니는 엘리를 보느라 여자를 거의 쳐다보지 않고 있는 장면도 좋았구요. 엘리가 대니가 탄 버스를 향해 달려갈 때나 대니가 엘리를 붙잡으러 지하철로 질주할 때 주변의 배경이 흐려지는 연출도 좋았습니다. 엘리의 앞에 붉은 지상철이 지나가는 부분을 그대로 담아 화면이 하얀색과 붉은색 둘로 나누어지는 연출도 있었는데요. 대니의 출신 국가는 폴란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대니는 엘리에게 자신의 교통카드를 주게 되는데요. 엘리가 등장하는 첫장면과 이어지게 만든 것도 잔잔하게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맥거핀.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번씩 들어보셨을 용어인데요. <대니와 엘리>는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영화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그 중심에는 맥거핀이 있습니다. 맥거핀은 영화에서 제대로 쓰기는 굉장히 어려운 기법이에요. 아무 의미도 없는 특정 소재나 연출, 각본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기법이니까요. 물론 더 넓은 의미에서는 인물들의 동기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총합하기도 하지요. <대니와 엘리>라는 영화는 하나의 거대한 맥거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인지는 지금부터 설명드릴텐데요. 이 부분은 영화를 안 보셨으면 아예 뭔소린지 이해도 안 되실 거라서 안 보신 분들은 넘기셔도 좋습니다.
<대니와 엘리>의 각본은 단순합니다. 대니와 엘리가 가방을 고용인에게 전달하고 돈을 받는다. 이게 끝이지요. 그럼 무엇이 중요할까요. 가방입니다.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그것이 감독이 관객을 현혹하는 맥거핀입니다. 그런데 결말에는 가방이 전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가방은 있으나 없으나 줄거리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단지 대니와 엘리를 만나게 하고 그들이 상호작용하게 하는 동기일 뿐입니다. 가방을 되찾은 고용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방 비밀번호 궁금하죠? 000이에요. 그들이 만든 것 중에 유일하게 단순한 일이 비밀번호 조합일 겁니다. 거기다 가방을 전달하는 행위 자체는 놀랍도록 쉽습니다. 초록색 가방을 든 여자와 가방을 바꿔오기만 하면 되니까요. 애초에 <미션 임파서블>이나 본 시리즈같은 영화를 보시면 초록색은 어려운 임무에 절대절대 쓰이지 않는 색깔입니다. 보통 빨간색을 선호하죠. 횡단보도만 떠올려 보셔도 그렇구요. 그러니 가방을 전달하는 미션 자체도 영화의 초점은 아닙니다.
맥거핀은 관객에게 흥미를 일으키고 작품으로 끌어들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허탈함과 허무함만 안겨줍니다. 그래서 리언 감독은 수많은 복선을 깔아서 관객이 맥거핀을 납득할 수 있도록 사전작업을 했습니다. 수영장의 창고에서 함께 밤을 보내게 된 대니와 엘리. 대니는 엘리에게 판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도둑이 판사에게 유령이 그랬다고 둘러대자 판사가 어? 나도 그 유령 봤는데?라며 석방해 주었다는 이야기지요. 도마뱀 리키와 레베카 바르가스도 같은 맥락입니다. 엘리를 괴롭히는 남자는 정말 이름이 리키일까요? 대니는 정말 리키라는 도마뱀을 길렀을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엘리의 관심을 끌기 위한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인기가 없었던 대니는 엘리에게 고등학교 시절에 인기 많은 레베카 바르가스라는 소녀를 이런 방식으로 꼬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레베카 바르가스에게 나를 만지면 친구들이 나에게 보상을 주기로 했어. 그러자 레베카는 무슨 보상인지 궁금해했고 결국 대니를 만졌다고 합니다. 엘리가 그럼 보상은 뭐였는지 묻자 대니는 레베카가 나를 만지는 게 보상이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레베카가 진짜 존재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보통의 영화에서 맥거핀은 이 정도 역할에 그칩니다. 그런데 <대니와 엘리>는 달랐어요. 그 의미 없는 요소들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대니와 엘리>가 사랑을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식이죠. 엘리는 결말부 대니의 어머니에게 자신을 레베카 바르가스라고 소개합니다. 대니는 도마뱀 리키를 이야기할 때 자신의 상황을 빗댑니다. 사랑은 어쩌면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해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지요.
이제는 대니와 엘리는 왜 그렇게 비루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대니는 폴란드계 이민자입니다. 대니를 연기한 칼럼 터너는 영국인인데요. 이 영화에서는 완벽한 미국 영어와 폴란드어를 동시에 소화해냈습니다. 솔직히 놀랐어요. 왜 두아 리파가 그를 좋아했는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터너의 열정이 연기를 통해 느껴지더라구요. 그러니 대니가 폴란드계 이민자인 것은 단순하고 의미없는 설정만은 아닙니다. <대니와 엘리>는 영화 중간중간에 대니와 엘리가 길을 지날 때면 여러 다른 행인들을 비추는 씬을 교차편집해서 넣습니다. 이들을 보시면 서로 다른 인종을 지니고 있고 서로 다른 문화의 옷을 입고 있어요. 그래서 <대니와 엘리>는 뉴욕이 배경인데도 묘하게 이국적입니다. 그리고 이때 건물에는 항상 무언가 붙어있습니다. 바로 미국 국기이지요. 그리고 대니와 엘리는 가방을 되찾기 위해 대저택에 침입하게 됩니다. 주인은 중년의 백인 남성이고 근육질입니다. 그는 경찰을 부르겠다고 대니와 엘리를 협박하지요. 미국의 이민자 정책과 그 모순 이민자들을 향한 인식까지도 영화는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 <대니와 엘리>의 원제도 방랑자들인데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제목치고는 너무 안 어울려서 바꾼 것 같지만 저는 방랑자들이라는 제목이 주제와 연결되어 더 좋았습니다.
이러한 디테일들이 빛을 발하니 관객은 대니와 엘리가 그동안 겪었을 어려움에 대한 정보 제시가 부족한데도 그들의 처지에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이해하게 되지요. 마지막 장면을 보시면 대니가 엘리에게 키스하고 당황하며 미안하다고 합니다. 엘리는 대니가 이미 여러 차례 같이 가자고 말했는데도 조심스럽게 아직도 같이 가고 싶냐고 물어보지요. 그들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능력이 없는 청춘들인 자신들에게 닥칠 역경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대니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엘리에게 함께 떠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니까요.
마지막으로 웃긴 장면들도 많습니다. 돈이 없는 대니가 식당에 당당히 앉아 엘리에게 어린이용 메뉴와 에피타이저 중에 하나만 골라 먹자며 내가 사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저는 제일 웃겼어요. 화면 색감도 좋습니다.
이국적인 화면과 이질적인 음악, 비루한 주인공들, 맥거핀으로 사랑을 속여낸 영화.
리언 감독의 <대니와 엘리>입니다.
평점 3/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