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광의 현란한 클로즈드 서클링
<저수지의 개들>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영화광으로 유명한데요. 첫 영화부터 그의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아이덴티티와 색채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법을 좋아하지는 않는데요. 뭔가 다 보고 나면 의미가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단순히 여러 영화를 짜집기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상하게 몰입이 되어 끝까지 집중해서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타 소위 어려운 예술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들이 흔히 받는 비판에서 자유로운 셈이죠. 쿠엔틴 타란티노는 시네필들에게 유독 사랑받는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타란티노 스스로가 괴랄한 깊이를 자랑하는 시네필이라 자신의 영화에 유독 많은 오마주와 패러디를 집어넣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시네필들의 눈에만 보이는 연출과 코미디는 그들에게 특별한 소속감과 유대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그리고 영화적 지식을 마음껏 확인하고 잘난 체 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도 한 것 같습니다. 빠가 까를 만든다고 요새는 타란티노를 싫어하는 사람도 꽤 되는 것 같아요.
<저수지의 개들>은 6명의 강도가 다이아몬드를 훔치기 위해 은행을 터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고 있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언제나 그렇듯 밀고자가 있었고 창고에 모인 강도들을 밀고자를 찾기 위해 의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의논이 끝나면 영화도 끝나지요. 제목부터 창고 영화이자 B급 영화를 표방하고 있는 저예산 영화이지만 박진감은 상당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효율적인 연출과 맛깔나는 대사가 있습니다.
영화의 오프닝은 타란티노가 스스로 소개하는 첫 장면이기도 한 만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요. 6명의 강도와 2명의 주동자들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합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직접 연기한 브라운이 이야기를 시작하죠. 관객들은 귀를 기울이지만 곧 어이가 바닥이 납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마돈나의 Like a virgin을 당당히 해석하는데 그 내용은 아주 저급합니다. 경험이 많은 여자가 고추가 지나치게 큰 남자를 만나 자신이 처녀가 된 것 같다고 하는 것이 Like a virgin의 주제라고 타란티노는 당당히 주장하지요. 6명의 강도는 영화의 줄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의미 없는 말싸움을 벌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쿠엔틴 타란티노는 관객에게 상당히 많은 사실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영화가 추구하는 B급 방향성과 뛰어난 OST들, 헐겁고 산만한 각본까지요. 그리고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긴장감을 끌어내는 연출과 인물들의 성격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식까지도 드러내지요. 그는 은퇴할 때까지 이러한 연출 방식에 변화를 주지 않고 오히려 갈고 닦아 발전시켰습니다. 이건 여담인데 저는 Like a virgin 앨범에서 Material girl이라는 곡을 제일 좋아합니다. 공연했었기도 해서 그 곡에는 정이 들었네요. 최근에는 셀린 송의 <머티리얼리스트> OST로 삽입되기도 했었어요.
오프닝만 길게 서술했지만 그외에도 좋은 연출이 상당히 많습니다. 화이트와 핑크가 대화할 때 핑크는 안 보이게 배치하고 화이트의 뒷모습을 통해 심리와 대화를 서술하는 방식도 좋았구요. 오렌지의 정체가 밝혀질 때 그가 대사를 외우는 방식이나 옥상에서 술집으로 술집에서 화장실로의 공간 이동 그리고 그가 이야기에 빠져들어 카메라가 360도 회전숏을 잡고 그대로 화장실로 공간이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연출이 좋았어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의 집으로 해준이 이동하는 연출이 떠오르기도 했구요.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 속에 허구의 또다른 이야기가 있는 점이 타란티노의 헐겁고 산만한 각본의 매력을 제대로 전달해주는 것 같아 좋았어요. 이상하게 연극적이기도 하더군요.
타란티노의 영화는 오마주가 유독 잦아요. 그러나 다른 영화들의 오마주와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면이 있어요. 그것은 아시아 영화 특히 홍콩 영화를 유독 자주 오마주한다는 겁니다. 보통은 <매트릭스>처럼 액션과 의상만 오마주하는 선에서 그치는데, 타란티노는 하도 영화를 변태처럼 방대하게 보아서 그런지 다양하게 오마주합니다. <킬 빌>같은 영화를 보다보면 홍콩 사람들보다 홍콩 영화에 대해 빠삭할 것 같은 느낌도 있어요. 그의 이러한 성향은 그의 영화가 분명 서양의 영화인데도 동양적인 매력을 전달해주게 만들어요. 관객에게는 새로움을 가져다주고요. 강도들이 양복을 입고 위풍당당히 걸어들어오는 오프닝의 연출은 <용호풍운>의 패러디입니다. 애초에 범죄자들이 양복을 깔끔히 차려입는 느와르 장르의 요소는 홍콩 영화에서 시작되었지요. 이때 강도들의 이름 밑에 배우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그들은 창고의 개들이다라고 까버리는 제목이 인상깊었어요. 그 오프닝 직후에 차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는 오렌지의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되며 웃음을 주지요. 그렇게 죽을 거라고 시도때도 없이 소리치는 오렌지를 웃음 소재로 활용하면서도 군데군데 그를 롱숏으로 잡아주며 공허하고 연약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또 플래시백의 빈번한 사용과 액션의 비중이 줄고 심리극이 느는 등의 연출과 전개 방식은 전형적인 2세대 홍콩 느와르의 전개 방식이지요. <무간도>를 떠올리시면 편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의 삼자 대치 장면은 <석양의 무법자>같은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의 영화를 떠오르게 했네요.
한편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을 하나만 고르라면 아마 블론드가 경찰의 귀를 신나는 노래와 함께 춤을 추며 잘라버리는 충격적으로 잔인한 장면과 직후에 오렌지가 정체를 밝히며 블론드를 쏴 죽여 버리는 장면일텐데요. 이 장면의 OST도 아이러니하게 무척 좋습니다. Stuck in the middle with you라는 노래인데 가사는 좀 철학적이긴 해도 신나고 좋더라구요. 얼마 전에 <부고니아>라는 <지구를 지켜라> 리메이크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에서 Basket case가 삽입된 장면과도 유사한 것 같아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저는 타란티노가 시대를 잘 타고났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습니다. 저 장면뿐만 아니라 백인 강도들이 시도때도 없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 장면들이나 저급하고 야한 농담이나 욕설이 구체적으로 나열되는 장면들을 보면 지금 개봉했으면 최소 사회적 매장 최대 쇠고랑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를 이렇게 좋아하고 잘 아는 사람이어야지 이렇게 비호감일 수 밖에 없는 B급 요소와 잔인함 그리고 저급함을 가지고도 관객에게 재미와 해방감을 주고 설득시킬 수 있구나 이런 양가적인 생각이 동시에 드는 특이한 경험을 좀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도들의 캐릭터가 워낙 확실하고 매력적이라 캐릭터 놀이로만 봐도 재밌습니다. 저는 유일한 상식인 포지션인 핑크가 재미있었어요. 블론드가 화이트에게 개처럼 짖지 말고 행동을 해라라고 욕하자 아이고 난 모르겠다 식의 표정을 지으면서 화면 저 구석탱이에서 얼굴을 쓸어내리는 장면이라던지 삼자 대치 장면에서 조용히 난간 아래 숨어버리는 등의 장면이 좀 웃겼거든요.
역대 최고의 감독 데뷔작 중 하나이자 역대 최고의 B급 범죄 영화 중 하나.
타란티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입니다.
평점 4/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