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가 안색을 바꾸자 무섭게 드리우는 아이러니의 그늘
이번주에는 <왕과 사는 남자>와 <휴민트>를 보았습니다. 둘다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이 되었어요. 하나는 깔끔한 수미상관을 이루는 각본과 미쳐버린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였구요. 워낙 장항준 감독이 인간적으로도 훌륭하신 분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해서 영화가 흥행하니까 저도 기분이 좋았어요. 예전에 예능에서 <쉬리>와 블록버스터 영화 고증 관련으로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겸손하고 말도 잘 하시는데 무엇보다도 영화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응원해 왔었거든요. 특히 저는 뗏목과 활줄을 연결시키는 복선도 좋았지만 한명회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의 연출이 인상깊었어요. 바스트샷인데 머리부분을 잘라서 고문받는 사육신이 배경으로 생생히 잡히도록 유도하여 위압적이고 권력이 있는 인물의 특성을 단숨에 전달하고 결국에는 어린 왕의 위에 우뚝 서 있게 될 때까지 당당히 걸어가는 모습이 좋았거든요. 이 한 장면으로 단종과 한명회를 동시에 관객에게 설득시켰다고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휴민트>도 완성도가 <왕과 사는 남자>와 비례하는 수준의 좋은 영화입니다. 강점이 완전히 달라요. 각본은 조금 복잡하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감도 있지만 화면 색감과 연출은 확실히 좋구요. 후반부 액션신은 할리우드 영화의 카 체이싱과 서부극의 삼자대면, <존 윅>에서 본 것 같은 현란한 싸움과 타격감이 돋보였어요. 특히 차 2대가 가운데에서 회전하는 장면이 <존 윅 4>를 떠오르게 하더라구요. 차 사이를 누비는 조인성과 박정민 박해준의 클라이막스도 훌륭했습니다. 어머니가 박정민 팬이시라 같이 봤어요. 보니까 청룡영화상의 영향으로 박정민의 첫 멜로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시던데 실은 소녀시대 윤아와 한번, 도깨비의 김고은과 한번 찍었었습니다. 근데 두 영화가 다 망해버렸다보니 언급하기도 뭣하고 그냥 신세경과 첫 멜로를 찍은 걸로 해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요새 한국영화가 망해버렸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제가 보기에 아직은 살아있거든요. 두 영화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래서 오늘은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들고 왔습니다. 제가 류승완의 영화를 본 적이 잘 없어서 좀 부족할 수도 있는데요.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일단 제가 본 류승완의 영화 중에는 제일 좋았습니다. 여러 부분에서 코엔 형제의 데뷔작 <블러드 심플>이나 제가 이전에 리뷰했었던 타란티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좀 의견이 갈릴수도 있겠는데 개인적으로는 <저수지의 개들>보다 나았습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4개의 단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영화입니다. 왜냐하면 저예산으로 앞의 단편영화를 찍고 그 영화들이 성공하자 투자를 받아 뒤의 부분을 제작했기 때문입니다. 코엔 형제의 <블러드 심플>도 그랬습니다. 코엔 형제는 일단 예고편부터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투자하여 첫 작품을 완성시켰지요. 그래서 예고편과 본편의 배우가 다릅니다. 아무튼 4개의 단편은 내용은 이어져 있지만 연출방식이 서로 뚜렷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초콜릿을 꺼내먹는 것 같은 재미도 있어요.
그중에 첫 단편이 바로 위의 패싸움입니다. 패싸움은 예고와 공고의 학생들이 당구장에서 서로 시비가 붙으며 패싸움을 벌이다 살인이 발생하는 내용입니다. 류승완 감독은 자신의 첫 작품부터 남다른 액션 연출을 자랑했습니다. 혹 대학가에 가셔서 대학생들이나 신인이 출품한 15분 남짓의 단편들을 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아실 수도 있으실 텐데요. 액션 영화는 눈에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인이 장비 없이 연출하기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저도 친구 하나가 액션 단편을 찍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결과물이 안타까웠습니다. 원래 그럴수밖에 없는 장르인 것 같기도 하구요. 이렇게 연출하기 어렵다는 장르의 특징 때문에 이소룡과 톰 크루즈가 연기가 압도적으로 뛰어나지는 않음에도 영화 역사에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패싸움은 여러 대자본을 투입받은 영화와 비교해도 너무 좋았어요. 오락실 게임을 이용해 비유적으로 연출한 부분이라던지 롱숏으로 패싸움을 잡은 부분과 클로즈업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게 좋았고 중간에 카메라를 잡고 거기에다 주먹질을 하여 타격감을 강조한 부분까지 좋았습니다.
여튼 석환이 일으킨 싸움에 우발적으로 휘말린 성빈은 끝내 맥주병으로 현수를 때려 살인을 하고 맙니다. 이때 교차편집으로 목격자인 당구장 주인의 인터뷰가 삽입되는데요. 이래서 어린 것들은 훈육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버르장머리가 없어진다느니 경찰은 부를 때는 안 오고 애 죽고 나서야 빌빌 기어온다느니 사회비판적인 문구가 군데군데 삽입되다가 마지막에는 뭐...나랑은 상관없으니까.로 끝나는 독백과 현수의 피웅덩이가 점점 커지는 장면이 오버랩되는 것이 압도적이었어요. 다만 단점은 저예산 티가 나고 화질이 안 좋습니다.
두번째 단편은 감옥에서 7년을 복역하고 나온 성빈이 일자리에서 해고당하고 어쩔 수 없이 조폭의 세계로 빠져드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빈은 자신이 죽인 현수의 환상을 봅니다. 그래서 이 단편은 공포영화의 형식을 띠고 있어요. 한편 그새 형사가 된 석환은 자신이 일으킨 싸움으로 인해 성빈이 살인자가 되었는데도 의도적으로 그를 무시하고 멀리합니다. 결국 조폭이 된 성빈은 자신을 보호관찰한다는 명목으로 괴롭히던 이 형사를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살해하고 떠납니다. 이때 이 형사의 발에 앨리베이터 문이 걸려 열렸다 닫혔다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네요. 그렇지만 완성도는 좀 안 좋습니다. 현수의 환상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점프 스케어고 단순히 프레임을 성빈에게 한정하는 방식을 통해 공포감을조성하려는 연출이 엉성한 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겁이 많은데도 전혀 무섭지가 않더라구요.
현대인은 형사가 된 석환이 성빈의 두목 태훈을 검거하는게 답니다. 등장인물은 오직 두 명이구요. 둘은 주차장에서 그야말로 죽어라고 싸우는데요. 그 과정만 계속 이어지고 중간중간에는 둘의 인터뷰가 삽입됩니다. 이때 둘의 위치가 다름에도 인터뷰는 제법 유사하고 생각하는 바까지 비슷한 것이 참 오묘합니다. 사회를 비판하고 비관하는 논조가 스미면서도 아이러니와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그야말로 처절한 과정을 지나 태훈은 끝내 검거되고 말지요. 좋은 의미로 관객까지 피곤해지더라구요. 이때 창문을 통해 십자의 빛이 바닥에 비추어지고 그 네모 안에서 뒹구는 둘의 모습이 굴레에 갇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4번째 단편은 석환의 동생 상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때 상환은 류승범이 석환은 류승완이 맡은 것이 현실감이 있더라구요. 둘의 대화와 손찌검이 자연스럽더군요. 상환은 놀랍게도 조폭이 되고자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었고 태훈의 검거로 두목이 된 성빈에게 찾아가 받아달라고 부탁하고 성빈은 잘 달래서 돌려보내려다 석환에 대한 복수심에 그를 받아줍니다. 상환은 조직의 칼받이가 되어 친구들과 함께 피투성이가 되어 눈밭에서 죽어갑니다. 같은 시각 석환은 성빈과 당구장에서 다시 만나 다시 처절한 싸움을 벌입니다. 성빈은 석환의 양눈을 찔러 눈을 멀게 합니다. 눈에서 피를 철철히 흘리면서도 동생을 죽인 성빈을 찾아 죽이려고 발버둥치는 석환을 성빈은 싸울 의지를 잃고 황망히 바라봅니다. 결국 석환은 성빈을 목졸라 죽이지요. 하얀 눈이 내리는 아래 죽어가는 상환과 당구장에서 웃음을 나누는 석환과 성빈이 교차편집됩니다.
4번째 단편은 앞의 세 단편과는 질적으로 다른 액션과 각본을 자랑합니다. 당구장에서의 아이러니를 완성시키는 성경의 구절과 눈이 내리는 이미지와 평화로운 음악 아래의 처절한 싸움. 오락실의 결투 게임을 연상시키는 아이들의 우스꽝스러운 싸움이 어른들의 살인과 어쩔 수 없는 폭력으로 이어지는 과정. 희생되는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 사회적인 감옥에 대한 비판과 폭력의 순환까지 담아낸 류승완의 영화는 우스꽝스러운 화질의 단편에서 흑백의 서사시를 그려낸 걸작으로 진화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4개의 단편을 통해 관객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지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함께 한국역사상 가장 우수한 데뷔 영화 가운데 하나.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입니다.
평점 5/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