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킴 트리에, 센티멘탈 밸류

개인과 예술이 회전하며 맞물리는 집의 재건축

by 도연호

오늘 <센티멘탈 밸류>를 보고 왔습니다. 저에게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보다도 심지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보다도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에 과분한 영화라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도 인간과 생, 사랑에 대해서 독창적인 방식으로 탐구해냈던 영화였는데요. 주인공이 동일한 단편 영화를 여러 개 이어붙인 느낌이 없지 않아 있어서 별로였던 부분도 있었지만 레나테 레인스베가 약을 하는 장면의 창의적인 연출과 당연하게 느꼈던 상식이라는 이름의 편견에 대한 반발과 인간의 심리를 이어붙인 주제라던지, 엔딩이 주는 아이러니와 깊이는 대단했었던 영화라는 기억이 있었습니다. 제 취향에는 <센티멘탈 밸류>가 더 잘 맞았습니다. 그럼 이제 제대로 해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래 글은 영화 보신 분들이 아니시면 이해가 잘 안되지 싶습니다. 그리고 좀 길수도 있습니다. 이왕 쓰는 거 세세하게 다 쓰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내용이 상당히 다층적이고 복잡한데 어렵기까지 합니다. 근데요. 아예 이해가 안되어도 정말 재밌을 수 밖에 없는 영화니까 무조건 추천드립니다.




창작자와 창작물


트리에의 영화는 개인의 생에 대한 탐구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트리에의 영화에는 여타 작품들보다 창작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이 더 깊이 반영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전에도 <어나더라운드>라는 북유럽 영화를 리뷰했었는데요. 그 리뷰를 보시면 트리에의 영화뿐만 아니라 북유럽의 영화가 그러한 경향이 많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제가 행복 심리학에서 배운 바로는 개인주의적인 면모, 개인에 집중하는 면모는 영화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북유럽 사회와 문화의 특징이기도 했지요. 어떻게 보면 앞서 리뷰한 빌뇌브의 영화와도 유사성이 있습니다. 트리에의 영화는 거시적인 개인을 미시적으로 분해한다면 빌뇌브는 거시적인 세상에 놓인 미시적인 개인을 바라본다는 차이가 있지만요.


<센티멘탈 밸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창작물과 창작자의 경계를 어그러뜨리고 불분명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언니 노라와 아빠 구스타브 그리고 동생 아그네스의 관계와 심리를 비유적으로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라는 매체 혹은 창작이라는 행위가 그들의 상처와 관계를 치유하지요. 지금 이 문장들은 아마 영화를 다 보셨더라도 이해가 잘 안될 것 같습니다. 제 능력 부족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문장들이 사실상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먼저 첫번째 문장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극중극을 살펴볼까요. 이 영화는 극중극이 여러번 등장합니다. 주요한 극중극은 아빠 구스타브의 마지막 영화이지요. 구스타브는 유명한 영화감독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의미가 있는 영화를 만드려고 합니다. 구스타브의 어머니는 어린 구스타브가 학교로 가자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구스타브는 그 장면을 영화의 엔딩으로 만들고 싶어하지요.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 역으로 딸 노라를 캐스팅합니다. 그러나 구스타브는 이혼으로 어린 딸들을 떠난 뒤 오랫동안 그들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던 노라는 거절하지요. 그런데 이 영화는 구스타브가 의도했든 안 했든 구스타브의 어머니와 딸 노라의 상처가 다양하게 혼재된 방식의 대본으로 진행됩니다. 심지어 대본에는 자신의 상처까지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혼재되어 있다고 어떻게 단정하느냐고 물어보신다면 대사로 한번 연출로 한번 알려줍니다. 검은 화면에 노라와 아그네스 구스타브의 얼굴이 섞여 나타나게 한 장면을 떠올려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극중극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의 회고전에 등장한 아그네스를 주연으로 한 영화이고 하나는 노라의 연극들입니다. 연극은 3개가 등장하는데요. 아마 기억이 안 나실 것이니까 정리해드리자면 첫번째는 오프닝 직후에 등장한 노라가 병적인 불안에 휩싸여 난동을 피우는 장면이 등장한 그 연극입니다. 그녀는 무대에서 도망치고 싶어하지요. 이 연극에 대해서는 추후에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아버지에게 너는 분노에 너무 가득차 있어. 그런 사람은 사랑받기 어려워.라고 폭언을 들은 직후의 침대 옆에서 파란 옷을 입고 오열하는 장면이 담긴 연극입니다. 이 오열은 연기일수도 있고 아버지에게 폭언을 들은 노라의 실제 감정이 드러나는 장면일수도 있다는 장면에서 의미심장하지요. <돌이킬 수 없는>이 영화에 등장해서 그런지 저는 이 연극 장면에서 <도그빌>이 떠오르기도 했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프닝의 말미를 장식했던 안톤 채호프의 갈매기가 있습니다. 이 연극은 노라가 스스로가 쓴 연극을 연기하지 않고 채호프의 연극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상징적입니다. 노라가 아버지와의 관계 개선을 회피하는 동시에 개인의 이야기에 담긴 상처를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동시에 구스타브가 노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드러내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구스타브가 술에 취했을 때 그는 노골적으로 노라의 본업인 연극에 대한 불호를 드러내며 언제나처럼 딸에게 무안을 줍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그래도 나 채호프는 읽을 수 있다고 의미없이 중얼거리는데 연극을 싫어해서 딸의 연극을 한번도 보러오지 않았는데도 사실은 딸의 첫 연극이 무엇이었는지 아직까지 기억할 정도로 그녀를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지요. 이 모든 극중극들의 연기와 대본 그리고 제작 과정은 구스타브와 노라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이상할 정도로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편집이나 기타 연출로 이 연극이나 극중극 영화 촬영분 그리고 영화의 현실 장면을 전혀 구분해 주지 않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헷갈리기까지 하지요. 거기다 현실의 장면과 같은 구도를 연극 장면이나 영화 장면에 배치하기까지 합니다. 사실상 같은 장면을 여러번 반복 변주해서 보여주는 셈이에요. 현실 장면 내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는데 특히 구스타브의 어머니의 자살과 구스타브의 딸 노라의 자살 시도는 명백히 대비가 되고 있습니다.




ㅈ ㅣ ㅂ


이제 두번째 문장 설명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극중극을 통해 창작자와 창작물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하면서 트리에 감독은 여러 비유를 이용합니다. 대표적인 비유가 집입니다. 이미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오프닝과 엔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엔딩은 조금 있다 설명드리고 오프닝 설명드리겠습니다. 오프닝은 집의 시점으로 진행이 됩니다. 카메라가 패닝하며 공원의 전경을 비추고 나면 한중간의 집으로 전환이 됩니다. 초등학생 노라는 사물의 시점으로 생각해보라는 과제를 받고는 자신을 집으로 생각했다고 하지요. 집은 발로 두드리는 소음과 가득 차 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구요. 또 집에는 언제부터 있었을지 모르는 작은 틈이 있습니다. 구스타브와 노라의 어머니가 싸우는 소음이 들려오자 틈이 넓어지는 것처럼 연출적으로 부각이 되지요. 그리고 끝내 아버지가 떠나며 그 소음은 사라지고야 맙니다. 집은 비워지고 가벼워지구요. 그래서 집은 노라의 분신으로 기능합니다.


아까 제가 <센티멘탈 밸류>는 같은 장면을 여러번 반복 변주해서 보여준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중에 하나가 집으로부터의 도피입니다.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려 하자 빈 화분을 들고 도망가는 노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동안 집에서 도망치는 노라를 보여주는 구도는 동일합니다. 마침 오프닝 직후에 등장한 노라의 연극을 보여줄 때도 연극이 아닌 노라가 연극 시작 직전에 도망치는 장면을 보여주지요. 노라가 연극할 때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점, 그리고 집은 노라의 분신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노라의 도망은 기이한 아이러니를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노라는 스스로에게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아까 극중극 설명할 때 극중극 영화에서 하나를 빼먹었었지요. 구스타브의 회고전에서 아그네스가 등장하는 극중극 영화입니다. 아그네스는 독일군에게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집이 나레이터로 등장하는 장면이 중반부 한번 더 나오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집은 노라의 분신이 아니었습니다. 집은 구스타브의 분신이기도 했던 것이지요. 발로 두드리는 소음의 장면에서 삽입되었던 발은 젊은 구스타브가 탭댄스를 추는 장면이었음이 추가로 밝혀집니다. 노라와 아그네스에게 아빠 구스타브의 이혼이 상처로 남았듯이 구스타브에게는 나치에게 고문당한 할머니의 자살이 상처로 남았음이 드러나지요. 집은 이제 구스타브와 노라의 센티멘탈 밸류가 혼재된 공간이라는 의미로 재건축됩니다. 그럼 구스타브가 스스로에게서 도망치는 장면도 있었을까요? 자문자답하자면 있습니다. 그가 레이첼과 대화를 마치고 난후 집밖에 나와 집에다 대고 엿을 날리며 술을 마시던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그는 어쩌면 딸들을 사랑해주지 못하고 늙어버린 자신을 향해 욕설과 비웃음을 던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결국 심장병이 도져 쓰러지고 말지요. 그리고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구스타브의 어머니가 아들이 집을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살을 했을 것이니 그때도 구스타브는 집에서 멀어지고 있었겠네요.




재건축


그럼 이제 자연스럽게 의문이 드셔야 합니다. 이 극중극들과 집에 대한 비유는 그럼 대체 뭔 의미가 있을까요? 그걸 아시려면 정말 죄송하지만 또 추가적인 한 가지 상황을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아까 제가 개인의 상처를 감당할 수 없었던 노라는 연기로 괴로움을 승화시키고 있다는 투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만 그녀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쓰기를 회피해왔지요. 아버지 구스타브도 이를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그럼 구스타브는 뭐가 다를까요? 아닙니다. 구스타브와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제작자는 이제야 이 작품에 도달할 수 있었다며, 자네는 그동안 써왔던 이야기들과 똑같은 이야기를 쓰고 있으며 그것을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로 내놓게 된 것뿐이라는 요지의 말을 하지요. 회고전에 나왔던 구스타브의 전작에 등장한 도망치던 아그네스와 뒤를 쫒아오는 독일군을 생각해보시면 전자는 딸들에게서 후자는 구스타브의 어머니에게서 따왔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구스타브는 허구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다양한 형식으로 자가복제해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은 구스타브의 생에 대한 이야기의 원본인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부녀는 서로를 지독하게 혐오하면서도 굉장히 닮아있습니다. 직설적이고 신랄한 어투, 끔찍한 감정기복과 소통을 어려워하는 점, 예술을 이용해 고통을 승화한다는 점까지 닮아있지요. 다만 예술의 형태가 연극과 영화로 서로 다르고 아버지 구스타브는 딸 노라의 연극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이제 엔딩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전까지 상황을 극중극과 비유를 빼고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아버지와 딸은 비슷한 상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 상처는 부모가 준 상처들입니다. 구스타브는 상처를 준 주체이자 상처를 입은 객체이기도 하구요. 상처가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그들은 소통을 거부합니다.


엔딩은 아빠 구스타브가 수없이 설명해왔던 구스타브의 어머니의 자살 장면을 노라가 연기하는 원테이크입니다. 노라는 안정적으로 연기를 끝마치고 구스타브는 컷을 외치지요. 유튜브에 구스타브가 부재한 상황에서 노라가 한 자살 시도를 구스타브는 막아주지 못했지만 결국 엔딩에서는 노라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감독이자 아빠로써 컷을 외쳐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는 댓글이 있었는데요. 너무 좋고 공감이 많이 되어 베껴왔습니다. 이때 구스타브가 그동안 집에서 촬영할 것이라고 했던 것과 다르게 엔딩은 세트장에서 진행이 되고 있었음이 화면이 줌아웃되며 밝혀집니다. 또 노르웨이 국기를 가지러 구스타브는 어머니의 자살 시도 중에 집에 다시 돌아왔지만 엔딩에서는 폰을 가지러 오는 것으로 각색이 되었죠. 그동안 구스타브가 연극을 싫어한 이유가 조잡한 세트장 때문이었음을 고려하면 구스타브는 딸이 상처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노라는 반대로 아버지의 본업인 영화에 참여하고 있지요. 그렇게 둘은 서로의 관계를 다시 이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잇다른 각색들은 제가 보기에는 <센티멘탈 밸류>가 노라와 구스타브의 이야기일뿐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일수도 있다는 암시를 던져주는 요소들입니다. 어쩌면 반복 변주되는 동일한 장면들도 그렇구요.




그대에게


아마 부모랑 안 싸워본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나는 아니야!하는 못된 놈들이 있을텐데 그럴리가 없다고 니가 머리가 안 좋아 기억하지 못할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가까울수록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기기가 쉽습니다. 일단 저는 그랬고 남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센티멘탈 밸류> 속 지하실의 작은 틈처럼 상처는 점점 커지고 벌어져 가족이라는 집을 무너뜨릴지도 모릅니다. 저는 아버지가 할머니께 소리를 지르시는 것을 보면서 자랐고 그래서 그런지 가끔 부모님께 특히 아버지께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이 들때도 있었습니다. 아마 몇번 질렀던 것도 같습니다. 제가 친구나 선생님에게 소리를 지를 엄두도 못냈다는 생각을 하니 부끄러워지네요. 커가면서 할머니도 아버지도 딱히 잘못한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상처는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작게 남아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이제 진짜 마지막으로 좋았던 장면 한두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구스타브가 오랜 친구인 촬영감독을 고용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그가 다리를 절 정도로 몸이 안 좋아져 핸드 헬드로 촬영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고통과 미안함, 충격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촬영 감독을 교체하기로 마음먹는 장면. 그리고 구스타브의 대본 일부를 노라가 소리내어 읽으며 겉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나약하게 신에게 기도하고 싶지 않지만 절로 기도하게 되는 고통. 그리고 자식에게서 느낀 여인에게서 실연당한 듯한 고통을 부모님에게 고백하는 딸의 대사이지요. 구스타브는 낭만적인 구석이 있어서 딸을 연인처럼 사랑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레이첼과의 미묘한 관계, 틈만나면 딸뻘인 여자들에게 립서비스를 하는 모습과 레스토랑에서 노라와 연인처럼 보였다는 직원의 뜬금없는 대사 그리고 위의 대사까지 고려하면요. 그리고 전 아내의 장례식에서 노라에게 장례 교회에서 했니? 니들이 신자가 되버린 거냐?라고 비꼬았던 실제 무신론자 구스타브와, 실은 너무 고통스러워 매일 술을 마시며 신에게라도 기도하고 싶었을 대본의 구스타브가 대비되어 감정을 자극하기도 했네요.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부모와 자식 생의 관계를 극중극과 집이라는 비유로 탐닉한 영화. 관객 모두에게 각자의 센티멘탈 밸류로 다가올 영화.


요아킴 트리에의 <센티멘탈 밸류>입니다.




평점 5/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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