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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닉 Oct 03. 2017

연애상담일기 - 대학로 연극배우의 추석이야기




명절이 돼도 고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추석 당일에도 응급실에서 환자를 돌봐야 하는 의사와 간호사, 귀경길을 책임지고 있는 기관사와 고속버스기사, 치안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경찰과 소방관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비상이 걸린다.


안전과 이동을 책임지는 직업의 사람들 말고도 명절에 쉴 틈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배우와 스텝이다. 


그는 대학로 10년 차 배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한 뒤로 계속 대학로에서 극단 밥을 먹었다. 올 해도 추석에 어김없이 공연이 잡혔고, 추석 당일에도 집에 내려갈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를 찾아갔을 땐 리허설이 끝났을 때였다. 추석 선물을 건네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올 해도 스팸."


"너 스팸 좋아하잖아!"


"다들 선물로 스팸만 줘서 계속 스팸에 밥만 먹고 있어요. 고시원 벽이 스팸 벽이 됐어요!!"


"그럼 다음번 추석 땐 수제햄으로..."


"농담이에요. 고민하지 말고 스팸으로 계속 줘도 돼요."


"외국인 친구가 스팸을 사는 걸 보고 비상식량이냐고 묻더라. 생필품도 없던 시절에 선물로 줬던 게 아직도 이어져오고 있다고 말하니까 더 이해를 못 하더라고.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다른데 왜 계속 그렇게 하냐고 되물었어. 생각해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더라고."


"그냥 작은 거라도 서로 주고 싶어서 그런 거지 별 거 있겠어요. 작은 선물이라도 주는 기쁨이 있잖아요. 저처럼 능력 없는 사람들은 받기만 하고요."


"너 답지 않게 왜 그런 소리를 해?"


"올해 추석도 집엔 못 갈 거 같아요."


"또 공연이구나. 연락은 드렸어?"


"아직 연락도 못 드렸어요. 계속 그렇게 살 거면 연락도 하지 말라고 한 게 한 달 전이었어... 저도 불효하는 건 아는데..."


"공연 때문에 그런 거지. 명절에 얼굴 못 보면 다 불효자겠다."


"명절에 얼굴 한 번 보여드리지 못하는 게 불효예요. 얼굴 못 뵌 게 언제 인지도 모르겠어요."


"그 정도로 오랫동안 못 뵌 거야? 그럼 네가 잘못했다. 공연 없을 때라도 찾아뵙어야지."


"공연이 없을 땐 알바해요."


"무슨 알바?"


"대리 운전하고 있어요. 제 연봉이 800만 원이에요. 집세만 간신히 내고 있어요. 밥도 먹고 과외도 받으려면 아르바이트를 안 할 수 없어요."


"과외도 받아?"


"다 연기에 필요한 것들이에요. 최근엔 액션스쿨에서 스턴트 과외받았어요. 춤은 기본이고 기계체조, 노래, 악기 배울게 산더미 같아요."


"그렇게 배울 시간도 있으면서 부모님하고 밥 한 끼 안 먹는 건 핑계 같다!"


"맞아요. 핑계예요. 지금이라도 당장 연극 그만두라고 하는데... 견디기가 힘들어서요."


"부모님도 네가 잘 되길 바라니까 그러시겠지."


"10년째 이 모양이니까 포기하란 말이겠죠. 재능이 없는 배우는 별 볼 일 없잖아요."


"무대에 오는 건 여전히 즐겁니?"


"네. 좋아요. 더 잘 하고 싶고요. 잘 나가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욕망에 비해서 재능이 너무 부족해요."


"그럼 부모님에게도 잘 말씀드리지 그랬어?"


"뭐라고 말씀드려요? 제가 행복한 일을 하니까 아무 소리 말고 응원해 달라고 말하면 되나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니까 괜찮다고요. 저에게 맨날 했던 말이잖아요."


"내가 맨날 그렇게 말했니? 네 말처럼 내가 행복한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꾸준히 말씀드리는 게 좋겠다는 말이지. 표현을 안 하시더라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말이야. 그리고 언젠가 잘 나가는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 드리고."


"아무나 그렇게 되나요?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었으면 모두가 버텼을 거예요. 저도 그런 보장만 된다면 불안해하지 않을 거고요. 지금까지도 버텼는데 몇 달을 몇 년을 못 버티겠어요. 몇십 년이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그 자리에 가 볼 수만 있다면요. 그런데 알고 있어요. 제가 그 자리에 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왜 그렇게 생각해?"


"대학로 배우로 십 년을 있어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평생 무명배우로 살다가 무명배우로 끝날 거라는 걸..." 


"이번 추석에도 공연 때문에 집에 못 가는 거 알고 있어.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 있는 것도 알고. 그런데 이해할 수 없다. 무대에 서면 행복하다는 배우가 무명배우로 평생 살 거라고 자포자기하는 모습이."


"사람이 참 이상하죠. 가장 행복한 일을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불행해져요. 잘하고 싶은데 실력은 안 늘고 투정만 늘고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거 아니? 넌 참 매력적인 사람이고 훌륭한 배우라는 거."


"갑자기 칭찬은!!"


"아니야. 정말이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건 대단한 일이야. 누가 알아주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매력적이야."


"입에 침좀 바르고 그런 말 해요."


"최근에 아는 선배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어. 아파서 병원에 가니까 6개월 남았다고 했대. 간암 3기라고 손 쓸 수도 없다고. 그 선배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는데... 최근까지 팽목항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었어. 그 선배도 참 가난하게 살았어. 매일 노숙자와 장애인에 관련한 작품을 찍으며 살았으니까. 돈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그 선배도 너와 비슷했어. 힘들어도 그 일을 하면 행복하고 기운이 난다고 했어. 네 말처럼 잘 나가지도 유명해 지지도 않을 수 있어. 그러면 좀 어떠니? 행복하고 충실한 삶을 살다가 마지막 날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일. 힘들지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그 선배님 일은 마음이 아프네요. 오랜 시간 동안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은 왜 그렇게 길 까요? 행복한 시간이 너무 짧고요."


"그러게 행복한 시간은 언제나 짧게 지나가 버리지. 그 순간의 기억을 잘 잡아둬라. 두고두고 기억하게..."


"여자 친구에게도 전해 줄게요."


"이번에도 여자 친구와 함께 무대에 오르니?"


"네 이번에도 같이 무대에 올라요. 나중에 둘 중 하나만 엄청 뜨면 어쩌죠?"


"걱정도 팔자다. 제발 한 사람만이라도 어마어마한 스타가 되길 바라고 또 바랄게!"


"고마워요."


"여자 친구랑 어때? 잘 지내?"


"잘 지내요. 없으면 없는 대로 불평하지 않고요. 둘 다 같은 처지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요즘 같은 때 그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하다. 두 사람을 보면 나도 힘이 나."


"추석 때 공연 보러 오세요!" 


"꼭 보러 갈게. 이번 추석엔 내려갈 수 없더라도 부모님께 공연 보러 오시라고 말씀드리면 어때? 여자 친구와 함께 무대에 서니까 꼭 보러 오시라고..."


"전에도 말씀드렸는데 듣지도 않으시던데요."


"그럼 좀 졸라봐. 전화도 수시로 드리고 문자도 드리고 뭐든 계속 조르면 오실 거야."


"맨날 그렇게 시키지만 말고 같이 해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그래 같이 하자. 내가 얼마나 집요한 사람인지 보여줄게. 이번 추석에 반드시 부모님을 만나게 될 거야. 네가 있는 대학로 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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