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엔 보이지 않는 색을 섞는 이유

파란 병과 오렌지(5)

by 김초록


저 지금부터는 뭘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작업 세팅을 모두 하고 나서 선생님께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선생님은 "그렇죠?" 하면서 다가와서 붓을 잡아들었다. "자. 먼저, 병 아래 그림자 보세요. 그림자랑 병의 경계가 안 보여요." 피사체(그림)엔 안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이해가 되게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하늘색보다는 탁한 파란색을 병 아래로 웃는 입처럼 그려 넣었다. 선생님은 이어서 말했다. "왜 초보자에게 유리가 어려우냐. 지금부터 설명해볼게요." 빛이 물병을 지나면서 빛의 자국을 어떻게 만들었느냐, 피사체(그림)를 보며 설명했다. "우선 지금 표현한 이 병이 어두워요. 그래서 물이 물 같지 않고 빛이 지나간 것 같지 않죠?" 라며 붓에 뭍은 물감 그대로 병 속에 경계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곤 종이랑 연필 주세요. 하면서 내 초기 작업 유리물병 대칭부터 그리는 방법을 (뒤늦게..) 알려주었다. 왠지 선생님은 수강생들 평균 연령에 비해 어린 나에겐 실수를 많이 해봄을 권하는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유리병 속 표현을 설명했다. "배경이나 빛이 이 굴곡으로 들어온다면 물과 유리 두께를 고려해서... 물의 표면장력이 있으니 곡선은 이렇게. 사진에 이렇게 보이지만 이건 사실 착시나 다름이 없어요. 표현은 과학의 논리대로 해줘야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과학실에서 실험과 탐구 공부하는 것 같았다. 배경/유리병 두께/물 표현을 내가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 그림이 납득이 된다니. 한없이 어리숙한 내 그림실력의 현주소를 파악하게 됐다.

과학의 이해가 필요한 부분은 5mm~1cm 정도로 표현해주는 게 좋아요



선생님이 그려주신 경계를 더 밝게 칠해보았다. 흰 끼가 돌지 않고 맑은 색으로 칠하는 거 맞냐며 확인받으며 열심히 칠했다.

"선생님. 저 이 정도면 밝아진 건가요?"

"음... 티가 안 나는데. 실수할 까 봐 더 밝게 못했구나."

"그럼 무슨 색을 칠해야 가까울까요?"

"버디터 블루(verditer blue)."



'버디터 블루'를 이렇게 알아간다. 탁하지 않은 원색이었구나. 이 병에는 '울트라 마린 블루'만 가장 근접한 색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병의 색은 맑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울트라 마린 블루' 외엔 생각을 못했는데 역시나 경험이 부족해서였다. 색의 지평을 넓인 기회가 되었다. 그 외에 선생님이 일러두신 오렌지와 바탕색의 경계도 조금은 과감하게 경계를 오렌지로 덮고 또 오렌지도 다시 손 보았다.

(왼쪽) 버디터 블루로 병의 하단부만 표현 / (오른쪽) 버디터 블루로 병 상단부까지 표현



가까이 보면 그림의 민낯이 된다. 그림이 조금 부끄러워할 것 같아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오렌지끼리, 오렌지와 뒤편의 빈틈을 메꾸었다는 증표로 찍어보았다. 이후에 오렌지의 꼭지도 세심하게 그려보았고 병 우측 아래 오렌지에 병의 그림자가 약간 걸쳐있다고 말씀해주셔서 그렇게 그렸는데 잘 표현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한 시간 반이 넘어가자 선생님이 드디어 오셨다. "자 봅시다."

어떤 마법이 벌어질까. 오늘 안에 그림이 끝날 줄 알았는데 나의 제자리걸음 표현으로 시간이 지체됐다. 진짜 완성은 다음 주가 되어야 한다. 붓을 들고 첫 번째로 선생님은 물의 경계선을 피사체(그림)처럼 일직선으로 보지 않았다. 좀 둥글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렇게 물이 들어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프러시안블루를 써서 물 표면을 짙게 하고 이후에 티타늄 화이트를 섞어서 표현해줄 곳을 더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병 입부터 몸통 즈음, 오렌지의 진짜 광택까지는 더 이상 올릴 수 없게 오늘 물감이 많이 올라갔으므로 그 전 단계 광택의 레이어드를 해주었다. 그림이 생명을 얻은 것 같다.



그리고 바닥으로 갔다. 티타늄 화이트가 들어간 하늘색과 핑크오로라를 섞어서 바닥의 굴곡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흑백에서 블루 계열만 쓸 줄 알았던 바닥에 회 보라가 등장한 것이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붉은 끼가 왜 들어가느냐? 하면 이 전체 톤에서 오렌지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하단부에 붉은 계열을 살짝 표현해주면 네모 프레임 속 그림이 조화로워진다고 한다.

위의 이미지를 확대해 보았다. (그럼에도 멀리서 봐야...)


'버디터 블루' 물감이 있으면서도 쓸 줄 모른 채 그냥 두기만 했다면 어땠을까? 있는 그대로만 구현하려고 계속 같은 자리만 걸었으면 그림 완성을 금세 마쳤을 수도 있겠다. 그럼 그림은 어떻게 보였을까? 그림은 자기만족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지 못했을까? 공감을 얻지 못한 그림은 외로울까? (작가로서? 그림으로서?) 이런 궁금증이 뒤따라왔다. 그럼에도 오늘 그림의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오로라 핑크'를 섞은 회보라 바닥이다. 전체의 조화로움을 위해 생각하지 못한 핑크 계열을 영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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