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 껍질 벗고 비행기에 타다

by 도요

더 이상 그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던 어느 날, 카페 맞은편에 앉아 따뜻한 라떼를 마시던 아빠가 말했다. "너 올해 제일 잘한 일이 걔랑 헤어진 거다. 넌 왜 이렇게 남자 보는 눈이 없냐?"

아빠가 내려놓은 컵 안의 하트 모양 라떼아트는 입을 댄 모양 그대로 찌그러져 있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좋은 남자를 알아보는 '눈'이 없는 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순간 철렁했기 때문이다.

어색하게 하하 웃고 대충 맞장구를 쳤다. 금세 화제가 바뀌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마쳤지만 집에 가는 길 내내 머리가 좀 복잡했다. 그와의 연애에서 내 과실은 몇 퍼센트였을까.


퉁명스러운 걱정의 말,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건네온 디저트 한 보따리. 그건 환갑이 넘은 아빠가 생각한 최선의 다정한 방식이었을 거다. 아빠 나름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걱정과 책망은 때로 같은 얼굴을 한 채 우리를 찾아온다. 그 둘은 너무 닮아 있어, 종종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랑에 실패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의심하지는 않기로 했다.



사랑할 때 내게 부족했던 건 눈이 아니라, 아마도 결단력 혹은 자기 확신일 것이다.

3년 동안 나는 세 번 이별에 실패했다. 그는 매번 당근을 내밀면서 날 붙잡았고, 나는 일말의 가능성을 놓지 못하고 자꾸 붙잡혀 주었다.

시간이 좀 걸리는 타입일지도 몰라. 이번에야말로 정말, 바뀔지도 몰라.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원했다. 밥 먹으면 양치를 하듯 당연하고 단순한 이야기였다.

그는 노력하기보다 화살을 내게 돌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말하는 쪽을 택했다.


"네가 자꾸 헤어지자고 하니까 '이별 트라우마'가 생겼잖아."

"싸움 안 나게, 말을 더 듣기 좋게 해야 하지 않아?"

"나도 노력하고 있는데 자꾸 노력하라고 하니까 스트레스받는다."
간단히 말해, 기분을 거스르지 않아야 예뻐해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조건부로 사랑이 주어진다는 건 꽤 그럴싸했다. 자아가 비대하지만 실행력은 없는 남자에게,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는 장녀는 쉬운 표적이었다.

나는 그런 말에 홀리듯이 '사랑받을 가치'를 증명하려 노력했다.


그가 약속한 미래의 달콤함에 기대를 걸었던 건 희망 때문이었다. 이미 소모해 버린 내 시간과 마음이 매몰비용이 되어 버렸다. 그의 조건을 조금만 더 채우면, 내가 책임감 있게 잘 해내면, 그가 약속을 지킬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 줘."라는 말을 나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으로 번역해 받아들였다. 그 번역이 나를 희망 안에서 끝없이 버티게 했다.


하지만 그의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하려 애를 써도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약한 결단력을 여러 번 그러모아, 네 번째에야 비로소 그를 내 삶에서 털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에게 더 이상 명분도, 당근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탈출 버튼을 누르고 한참 동안 그의 그림자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언제, 무엇으로 예민하게 굴지 몰라 긴장하며 지낸 기간이 너무 길었다. 마치 그 없는 평범한 하루를 까먹어버린 것 같았다.


내게 남은 건 상처가 아닌 습관이었다. 도마뱀이 낡은 껍질을 벗을 때, 덜 떼어진 조각 때문에 몸을 비비며 답답해하지 않는가. 내게도 그가 준 습관들이 껍질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분노와 원망, 외로움 등의 큰 감정을 다 건져내고 나면 새것처럼 비워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 앞에서 긴장하고,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대화를 이어갔다.


나아갈 준비가 끝났는데, 여전히 그의 망령이 내 발목을 붙잡는 걸 의식하자 짜증이 치솟았다. 화풀이를 하듯이 비행기표를 검색해 순식간에 후쿠오카행 티켓을 결제해 버렸다.

처음으로 그의 허락 없이, 일상을 벗어날 결정을 내린 순간이었다. 그래도 괜찮다는 사실이 묘하게 짜릿했다.


그는 늘 말했다. "난 한국에서 뼈 빠지게 일해야 되는데 너만 가서 놀겠다고?"

맛있는 걸 먹고 사진을 보내면, 자신은 못 먹어 억울하다 불평했다. 혼자 가는 걸 특별히 허락해 줬으니 과자를 양손 가득 사 오라고 했다. 혼자 떠난 길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고, 눈치가 보였다.


이번엔 달랐다. 누군가의 기분을 살피지 않아도 됐고,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익숙한 후쿠오카의 길 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길 위에서, 혼자가 주는 자유를 온전히 느낄 수 있으리라 직감했다.

곧 그 직감은 현실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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