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안에서 시작된 평화

by 도요

걷고, 요가를 하고, 사람들과 웃으며 편안함을 충전해 두어도, 할 일이 없어지면 공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애써 늘려 놓았던 숨도 얕아졌다.

평화는 내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만 흘러오고 있었다. 그럴수록 어설프게 내린 뿌리를 지켜 줄 단단한 울타리가 필요했다.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가슴이 내려앉을 때, 어두운 골목에 비친 그림자에 발걸음이 빨라질 때, 전화를 걸어 종알종알 떠들 상대가 없다는 사실이 외로웠다.

그가 그리운 건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가 날 사랑하고 지켜 줄 거라는 기대가 사라진 자리에 바람 드는 빈 공간이 뚫려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한 방도 그럴 때면 괜히 텅 비어 보였다.


괜찮아지고 있다 믿었지만, 어느새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그때 챗GPT가 제안했다. 상상 속에라도 내가 편히 숨 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보자고.

상상 속 방에서 쉬는 게 실제로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Safe Space, 곧 마음속 안전지대였다. 챗GPT는 빈 답지를 함께 채워 가듯 계속해서 작은 실마리를 건네 왔다.


혼자서도 편안할 수 있는 공간을 그려보다, 흙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을 떠올렸다. 두꺼운 흙벽은 온기를 머금었고, 촛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불빛이 벽을 따라 일렁이는 모습까지 상상하자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요가원에서 맡던 향이 공기 중에 번졌고, 포근한 바닥엔 요가매트를 깔았다. 창을 넘어온 가벼운 바람이 내 곁을 살랑였다.


처음엔 모든 장면이 낯설고, 억지로 이어 붙인 퍼즐 같았다. 이 공간을 생생하게 그려내기까지 며칠의 시간이 걸렸다.

눈을 감으면 곧장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매트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내 모습과 방 안 풍경을 떠올리며, 호흡을 길고 깊게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그곳에선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떤 일도 나를 재촉하지 못했다. 따뜻한 침묵만이 작은 방을 가득 채웠다.

바깥에서 밀려오던 생각과 감정이 먼바다로 밀려나듯 멀어져 갔다. 몸은 여전히 이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단단히 바닥을 딛고 있었다.


평화를 찾아 헤매느라 그간 좀 지쳐있었나 보다. 하지만 그 안에선, 평화를 억지로 좇을 필요가 없었다. 요가매트에 앉아 숨을 고르다 보면, 자연스레 평화로운 순간을 누릴 수 있었다.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방은 조금씩 변해 갔다. 키 작은 나무들이 주변에 자라났고, 사이사이 들꽃이 피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려 나무로 된 벤치도 두었다.


넓어진 공간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졌다. 그만큼 내 안에서 이 공간의 의미가 커져 가고 있었다.

'숨나 (सुम्न, Sumna)' — 산스크리트어로 기쁨, 은총, 보호. 나를 지키고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을 담았다. 그 이름을 떠올리면, 그곳의 공기가 현실로 배어 나오듯 따뜻함이 스몄다.



마음속 울타리는 눈을 감아야만 닿을 수 있는 세계였다. 현실은 여전히 그 너머에서 나를 흔들었다. 상상만으로는 부족했다.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성역이 필요했다.

누군가는 관념적 경계로 충분하다 말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지금 속한 공간을 성역으로 만드는 게 진정 강한 것 아니냐 물을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지만, 난 그럴 힘이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내 집에 살고 있어도 안전함을 느끼지 못했다. 치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와 함께한 3년간 내게 따라붙은 짙은 불안이 집안의 벽과 가구 속에 온통 스며 있었다.

남몰래 울었던 오래된 침대 위에 누워 있자면, 자격 없는 이에게 너무 많은 공간을 내어준 기억이 자책이 되어 흘러들었다. 그 집은 성역이 될 수 없었다.


그때 본가의 빈 방이 떠올랐다. 작은 방이긴 해도, 책상과 침대를 둘 순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치수를 재고, 문과 창문, 콘센트의 위치를 감안해 가구 배치를 그려 보았다.

더군다나, 본가에 가면 혼자가 아니라는 점도 마음을 움직였다. 스무 살 이후 가족과 함께 살았던 기간보다 혼자인 시간이 훨씬 길었다. 함께 밥을 먹고, 청소기 소리에 잠을 깰 수도 있을 것이다.


책상과 TV, 옷가지만 용달에 간단히 실어 본가로 향했다. 너무 오래 썼거나, 구색만 대충 맞추던 가구들은 처분했다. 당장은 침대가 없어 바닥에서 자느라 허리가 배겨도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마침내 사람 사는 공간에 들어온 기분이었으니까.


새 침대, 책상과 TV의 위치, 조명, 모니터 암, 커튼까지 꼼꼼히 골랐다. 덜어내고 채워 가는 과정에 몰두하다 보니 공허와 분노에 잠길 틈도 없었다.

두세 달이 지나자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다. 혼자 자기엔 조금 큰 침대, 눈높이에 맞춘 모니터,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새겨진 마우스패드, 꽉 찬 슬라이드장, 원하는 만큼 햇빛을 가려 줄 암막커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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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 모든 요소에 나의 필요와 취향이 스며 있었다. 그 과정은 단순한 방 꾸미기가 아니라, '이곳에 내 뿌리가 내렸다'는 증명이었다.


작은 방 하나지만, 이 문 안쪽에선 나의 선택만이 통했다. 작은 물건 하나하나가 내가 바라는 곳에 놓여있고, 모든 것이 나를 위해 기능했다.

나는 '나'를 내 통제 아래 있는 공간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소중히 두었다.


누구도 내 감정을 무시하고선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몸이 머무르기만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내가 가장 편안할 수 있도록,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든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그 방은 진짜 울타리가 되었다. 밖에서 지쳐 돌아온 나를 회복시키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길러주는 휴식의 장소로 자리 잡았다.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한 뙈기의 안전한 땅을 얻어내자, 더 이상 예상치 못한 일에 심장이 내려앉지 않았다.

상상 속 울타리에 숨어들지 않아도 괜찮았다. 현실의 방 안에서 깊은숨을 이어갈 수 있게 되자, 숨나는 차츰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오랫동안 나는 사람에게 쉽게 거리를 내주고 상처를 받았다. "얘기 좀 하자."라는 카톡을 받으면 용건을 알 때까지 심장이 따끔거렸다. 좋아하는 사람의 전화 한 통에 하루 일정을 통째로 바꾸어 버리기도 했다.

강아지도 아닌데 항상 사랑에 집착했고, 미움받기가 싫었다. 그래서 언제나 상대의 표정과 말 한마디에 눈치를 보고 휘둘렸다.


이제는 필요할 때 단호하게 선을 그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때에 따라선 화를 낼 수도 있어야 한다. 그에게 온통 내줬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내 마음이 증거였다.

애정이라는 미명 아래 던지는 말에 하루가 흔들리거나, 상대를 살피느라 내 기분이 무너져 내려도 그저 참고 넘겨서는 안 되었다.


가까운 사이라도 경계는 필요하다. 벽을 높이 쌓으면 상처를 막을 수 있지만, 그 안에 고립되어 버린다. 하지만 울타리는 다르다.

바람과 햇살이 드나들 틈을 남겨두고도, 나무가 자라는 공간을 충분히 허락한다. 이웃과 눈인사를 나누면서도, 안쪽의 삶을 안전히 지켜낸다.


예전의 나는 고립이 두려워 경계를 먼저 허물어 버렸다. 웃고 싶지 않아도 먼저 웃어 보였고, 내 필요보다 그의 부탁을 앞세웠다. 대가는 혹독했고, 내준 만큼 사랑을 받지도 못했다.

그걸 깨닫자 타인과의 안전거리를 지키는 게 조금 더 쉬워졌다. 거절은 고립이 아니라, 내 울타리를 지키고 초목을 돌보는 일이었다.


삶은 결국 고립과 보호 사이의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피어나는 건 어렵지만, 뿌리를 깊게 내리는 건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성장이다. 그건, 또한 내 안에서 시작되는 평화의 서막이다.

울타리 안에서 나를 지켜내다 보면, 햇살 좋은 오후에 문을 열고 이웃을 맞이하듯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내 사람들을 품을 수 있게 될 거다.


안전한 곳에 닿자, 이별 후 멈춰 있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하루들이 제 모습을 되찾았고, 내게도 드디어 일상 속에서 잃었던 것들을 가꾸어갈 차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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