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점은 언제나 '피어남'에 찍어야 한다

by 도요

사랑은 죽었지만, 나는 피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 화를 마무리한 후에도 며칠 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무엇을 말해야 진짜 '피어남'일지, 스스로에게 끝없이 되물었다.

그날의 사랑에도, 그날의 분노에도— 나는 아직 온전히 마침표를 찍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랑했던 시간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사랑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돌아가서도 안 됐다. 누군가를 사랑하느라 놓쳐버렸던 나 자신을 다시 품을 수 있기를 바랐다.

시간이 자연스레 해결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정적 감정과 마주하는 것도, 일상의 루틴을 회복하는 것도, 새순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는 것도, 모두 내 손으로 해내야 하는 내 몫의 일이다.


가만히만 있으면 가라앉아 버려서, 대부분의 날은 어떻게든 몸을 움직였다. 9시 전에 일어나서 침대를 정리하고, 오전 중에 집 안의 모든 창을 열어 환기를 하고, 봄볕과 봄바람을 집에 잔뜩 들였다.


집 안의 모든 공간과 짐을 점검했다. 싱크대 수전에서는 물이 조금씩 새고 있었다. 생각난 김에 근처 철물점에서 적당한 것을 사와 바로 갈아 버렸다. 흐려진 화장실 매립등도 교체가 필요했다.

더 이상 입지 않는 옷, 언젠가 쓸까 하고 오래 놔뒀던 물건은 모두 떠나보냈다. 당근이세요? 를 물을 일이 꽤나 많아졌다. 그렇게 먼지 한 올까지 모두 손걸레로 정성스레 닦아내면 성취감이 차올랐다.


오후 3-4시쯤 되면 요가 시간표를 보고, 기분에 맞는 수업을 골라 다녀왔다. 레몬그라스 혹은 화이트 세이지 인센스가 맞이하는 공간에서 코어를 다지고 머리서기를 연습하고, 숨이 차오른 채 사바사나를 귀하게 맞이했다.

정성 들여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곤 스킨케어, 바디로션, 헤어오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선물만 했지 나를 위해 한 번도 사본 적 없던 향수를 내 취향대로 골라 침대에 가볍게 뿌려주고 잠에 들었다.


누군가에게 잘해주는 법만 고민하던 나는, 자신을 위한 일상을 설계해 본 것이 언제였는지 잊고 있었다. '아, 항상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차츰 깨달았다.

가끔 화가 치밀어 모든 걸 놓고 싶은 날엔 하루 종일 누워 핸드폰만 보기도 했다. 자책은 하지 않았다. 이런 날도 필요했나 보다, 생각하고 가끔의 게으름을 용서했다.


이별을 마무리하며 건조하기 짝이 없었던 매일에 차츰 웃음이 배어들었다. 별 거 아닌 카톡 대화, 숏츠 하나에도 피식 웃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게, 작고 가벼운 변화가 피어났다.


회복은 직선도, 계단식도 아닌 파형 그래프였다. 괜찮아지다가도 출렁이고, 또 넘어졌다. 다만 그 흔들림 속에는 분명한 방향이 있었다. 내 마음은 분명히 위로 향했다.


쓰러지는 날들과 다시 일어선 순간들이 모여, 나는 여전히 살아내고 있었다. 내 안에서 그저 '그의 아내가 될 사람'으로 가치를 가졌던 내가, '나'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다이어트나 성형을 한 것도 아닌데 거울 속 내 모습이 자꾸 생기를 되찾았다. 여러 겹 쌓인 무기력이 조금씩 걷히며, 얼굴색이 밝아지고 눈빛에 총기가 돌아왔다. 마음의 회복이 겉모습의 변화로도 이어지고 있음을 차츰 느낄 수 있었다.



내게 필요한 건 나를 지키는 울타리였다. (중요: 벽이 아니라, 울타리다.) 그건 어떤 연인의 사랑보다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나를 지탱한다. 누굴 사랑하게 되어도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선 반드시 울타리가 필요하다.


아직도 가끔 울컥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새벽에 깨어 괜히 잠들지 못하거나, 글을 쓰다 말고 멈춰 서서 생각에 빠진다. 빈도가 줄었다 해도, 그럴 때마다 다시 마음이 구겨져 버린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날에도 따뜻한 차를 우린다. 편의점에 가서 라라스윗의 신상 아이스크림이 들어왔는지 확인한다. 안 들어왔어도, 괜찮다. 기대로 집을 나서는 것도 울타리를 짓는 과정이니까.


사람은 거창한 마음가짐과 대단한 변화로만 피어나는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포기하고 무력했던 나를 조금씩 일으켜 세우는 모든 행동, 그리고 가끔 주저앉더라도 다시 나아가는 것. 글을 쓰고, 밥을 차리고, 몸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는 것. 그러면, 사랑이 끝난 자리에 남은 침묵 속에서도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여전히 피어나는 중이다. 어제보다 조금 단단해진 뿌리로, 더 깊은 호흡과 더 정확한 감각으로. 그리고 '피어남'은 내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온전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믿는다.


오늘 내가 살아낸 별거 아닌 하루도, 누군가에겐 다시 피어날 수 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또한, 그 마음 안에서 자라나는 모든 조그만 계절들을 믿어 주기를 바란다.


메마른 땅에도 우리는 다시금 뿌리를 내릴 수 있고, 그 뿌리로부터 더 크게 피어날 수 있을 것을 안다.

결국, 그 모든 피어남이 우리를 살게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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