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젖은 양말

by 도요

소녀는 무엇이 담겨있는지 모를 거대한 원액 탱크 앞에 섰다. 나고 자란 이 시설에서 관리자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해왔지만, 아무래도 저 안에 들어가는 게 관리자들을 화나게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무서웠다.

왜 하필 소녀였을까. 다른 아이들과 함께도 아니고, 혼자 들어가라니. 뭔가를 비출 일이 좀처럼 없던 눈동자에는 공포로 인한 생기가 돌았다.


소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한 형벌은, 본 적 없지만 '죽음'이었다. 그런 형벌을 받더라도 탱크 안에서 익사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하고, 소녀는 걸음을 재촉하는 관리자들 앞에서 고개를 저였다.

관리자들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소녀를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시설 밖으로 내보냈을 뿐이었다. 퇴소 조치였지만, 소녀 외의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시설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설의 끝없는 어둠에 익숙한 소녀에게 바깥세상의 빛은 멈추지 않는 섬광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눈을 제대로 뜨는 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바깥은 도시였다. 소녀는 몰랐겠지만 도시에 물이 차오르고, 정체 모를 물고기가 살기 시작한 지도 꽤나 긴 시간이 흘러 있었다. 유수지를 마주 본 지하철 출구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져 물에 잠겨도 튼튼했다.


각각 장화나 운동화 등을 신고 나온 어른들이 익숙하게 짐을 풀자, 적당한 사이즈의 간단한 낚시채가 인원수에 맞게 나누어졌다.

모두,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양말 차림인 건 소녀가 유일했다.


검고 점액질로 덮여, 윤기가 번들거리는 물고기가 자꾸 물 위로 튀어 오르자, 어른들은 빠르게 모두를 통솔해 주변의 지형지물을 잡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했다.

건물의 펜스, 지하철 출구 외부의 금속 봉 등을 잡고, 낚싯대는 겨드랑이에 낀 채로 위태롭게 발 끝으로 디딜 곳을 찾았다.


어른들은 물 위에 서서, 낚싯대로 물고기를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담아갈 곳은 필요 없었다. 물 위로 올라온 검은 물고기들은 이내 터지듯이 사라져 버렸다.

소녀는 그걸 지켜보다, 이들은 물고기를 없애려고 나온 거란 사실을 곧 깨달았다.


친절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끝을 모르도록 거대한 시설 안에서, 소녀는 주어진 일이 무엇이든 충실히 해내는 법을 익혔다. 시설 밖이라고 다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소녀는 어른들처럼 물고기를 잡아 올릴 힘도, 용기도 없었다. 그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건 오래 생각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소녀의 양말은 이미 푹 젖었다. 축축한 감촉이 종아리까지 한기를 채웠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해서 양말이 젖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젖은 양말은 중요치 않았다. 뭔갈 해야만 했고, 그게 유일하게 소녀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물고기잡이에 정신없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소녀의 마른 몸이 출구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출구와 연결된 곳에 묘하게 물이 깊지 않은 곳이 있었다. 반투명한 청록색 지붕이 깔려 물빛은 어두운 녹빛을 띄었고, 바닥에는 사각형의 구조물이 보였다. 새끼 물고기들이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소녀는 물 위로 건너가 관찰을 시작했다. 새끼들은 성체와는 다르게, 인간의 피부색에 가까운 톤을 하고 있었다. 검은빛이 살짝 도는 걸 보니, 성체가 되면서 색이 변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긴 생각 없이 소녀는 낚싯대를 던졌다. 새끼 물고기는 별다른 경계 없이 빈 낚싯바늘을 입에 물었다. 물 위로 떠올라도 새끼 물고기는 바로 터지지 않았다. 낚싯대를 치켜들고 고민하던 그때, 또래 아이가 실실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소녀와 같이 작고 마른 아이였지만, 시설 밖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신발도 비교적 제대로 된 걸 신고 있었고, 능숙하게 낚싯바늘에서 새끼 물고기를 빼내어 물이 닿지 않는 곳에 올려 주었다.

말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소녀가 잡아 올리면 또 이렇게 해줄 게 분명했다. 안심하고 소녀는 모여있는 새끼들을 향해 낚싯대를 던지기 시작했다.


몰래 움직인 셈이었지만 어느새 어른들도 소녀 주변에 모여 있었다. 어른들의 작업은 얼추 마무리가 된 것이리라.

누군가는 물 위에 쭈그려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새끼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두 명의 아이를 바라보았고, 누군가는 검은 물고기가 더 없는지 분주히 주변을 살폈다.


소녀가 네댓 마리를 간신히 잡아 올리는 동안 어른들은 꽤나 많은 성체를 잡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꽤나 많은 숫자의 새끼들이 얕은 물속을 헤엄쳤다.


그 순간, 어른이 다가와 소녀의 낚시채를 가져가며 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구나." 뒤에 다가온 두어 명이 쉽게 남은 새끼들을 건져 올려 일을 마무리했다.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시설 안에서는 소녀가 한 어떤 일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을 뿐, 노력에 대한 공치사를 받은 적은 없었다. 마무리짓지 못한 일을 누군가 대신 해 줘서도 안 됐다. 모두, 제 몫을 하는 게 규칙이었다.


겪어본 적이 없어 바라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자 소녀는 벙쪄 입을 약간 벌리고 어른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살짝 웃더니 말했다.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 뜻 모를 말이었다.

소녀는 이들과 함께 시설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최소한 그게 쫓겨났다는 뜻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니. 사람도 없고, 물이 차오른 황량한 도시에서 이제부터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알 것도 같았다. 소녀는 푹 젖어버려 불쾌했던 양말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물 위에 서서도, 더 이상 종아리까지 젖지 않았다.





작가의 말

《젖은 양말》은 제가 브런치스토리에 처음으로 발행하게 된 글입니다. 꿈에서 시작된 이 단편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감각으로 새로이 세상을 딛어나가는 한 존재의 생존을 담았습니다. 단편도, 앞으로 보시게 될 에세이들도 모두 저라는 사람의 뿌리에서 뻗어나 같은 감각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