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프로코피예프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오늘 서울은 무려 37도를 기록했다. 잠깐만 밖을 나가도 태양에 살갗이 탈것만 같은 더위이다. 이럴 때면 절실히 몸과 마음의 피서가 필요하다. 당장 피서지로 떠나지 못한다면 실내에서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앞에 앉아 러시아 음악을 듣는 건 어떨까. 이 방법은 꽤나 효과가 있다.
지난 글에서는 무더위도 잊게 해 줄 흥미로운 러시아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1891년 태어난 프로코피예프가 1918년 러시아를 떠나 미국, 유럽에서 활동하다 1936년 마침내 러시아로 영구 귀국하기까지였다. 오늘은 그 이후의 이야기, 즉 1936년 러시아로 돌아온 프로코피예프가 생을 마감하기까지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1. 1936년 러시아 음악계
프로코피예프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기 전에 1936년 당시 러시아 음악계의 상황을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36년 러시아에는 음악가라면 반드시 가입해야 하는 단 하나의 단체가 존재했다. 바로 소련 작곡가 동맹이다.
1932년 4월 23일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발표한 결의문 '문학, 예술 조직의 재건에 관하여'에 따라 문학, 기타 예술 분야에서 기존에 존재하던 모든 단체가 해산되고 대신 '소련 작곡가 동맹', '소련 작가 동맹'과 같이 각 분야에서 단 하나의 단체만이 설립되었다. 따라서 음악계에서는 '소련 작곡가 동맹'이 유일한 단체로 존재했다.
소련 작곡가 동맹은 그저 이름만 거창한 단체가 아니었다. 새로운 곡의 공연 허가, 출판, 지불 등이 이 단체를 통해 이루어졌다. 곧 소련 작곡가 동맹은 음악가의 경력은 물론 생계와 직결된 단체였다.
1936년 러시아 음악계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1932년 완성하여 1934년 초연된 오페라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이다. 19세기 러시아 작가 레스코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은 1934년 1월 22일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1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초연되고 이후 2년간 러시아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연주되며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이 오페라의 운명은 1936년 1월 송두리째 바뀐다. 1936년 1월 26일, 볼쇼이 극장에서 새로 제작한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 공연에 바로 스탈린이 찾아온 것이다.
스탈린은 공연이 채 끝나기 전에 자리를 떠났고, 며칠 뒤인 1월 28일 소련 일간지 <프라우다>에는 '음악 대신 혼돈'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익명으로 실렸지만 사실상 당의 입장이나 다름없었던 이 기사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글이었다. 기사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음악 대신 '좌파주의자'의 혼돈만이 있다. 대중을 감화시키는 좋은 음악의 힘은 싸구려 광대 짓을 통한 독창성을 창조하려는 쁘띠 부르주아, '형식주의자'의 시도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 게임은 매우 안 좋게 끝날 것이다."
- '음악 대신 혼돈 : 오페라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에 대하여', 문성호, "소련의 음악정책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석사학위논문(2001),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95
당시 러시아 예술계를 지배하던 방법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개념은 다소 모호했는데, 이 길에서 벗어나는 작품은 '형식주의', '반인민적'이라는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오페라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을 통해 불과 서른 살에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가 된 쇼스타코비치에게 이제 '형식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다.
2. 용감한 피터는 늑대를 잡는다.
프로코피예프는 이 시점인 1936년 봄에 러시아로 영구 귀국한다.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을 시작으로 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공격은 진행 중이었다. 바로 이때 18년 동안 미국,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던 프로코피예프가 러시아로 돌아오는 것은 위험하지 않았을까. 프로코피예프는 과연 당시 러시아 음악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까.
물론 프로코피예프는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음악 대신 혼돈'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몇 년에 걸쳐 고심한 그의 귀국을 막지는 않았다. 프로코피예프가 당시 러시아 음악계의 상황에 대해 정말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또한 알고 있는 것과 체감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모두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1936년 봄, 러시아로 영구 귀국한다. 이것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 된다. 러시아로 돌아간 프로코피예프는 1937년과 1938년 딱 두 번 해외여행이 허가된다. 귀국하기 전 러시아 정부는 프로코피예프에게 정기적인 해외 공연 투어를 보장했지만 이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1938년 해외 공연 투어 이후 러시아는 더 이상 프로코피예프의 해외여행을 허가하지 않는다.
프로코피예프가 러시아에 영구 귀국한 직후 완성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피터와 늑대>이다. 모스크바 어린이 극장의 감독 나탈리아 사츠의 제안으로 프로코피예프는 <피터와 늑대>를 1936년 4월 단 며칠 만에 완성한다. 해설자와 등장인물(새, 오리, 고양이, 늑대, 피터, 사냥꾼, 할아버지)이 각각 정해진 악기로 표현되는 <피터와 늑대>는 훌륭한 교육용 작품일 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 듣기에도 즐겁고 생동감 넘치는 음악이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피터와 늑대>는 월트 디즈니사 와 계약을 맺고 1946년 <음악의 세계(영어 제목 Make Mine Music)>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프로코피예프는 새로운 영화음악 작업에 참여한다. 바로 러시아의 유명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이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13세기 노브고로드의 군주로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킨 영웅으로 불린다. 이 영화에서는 네프스키가 프스코프를 점령한 독일 기사단을 물리치는 사건이 다뤄진다.
특히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독일 기사단을 물리치는 장면이 유명하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서 역시 프로코피예프의 생생한 음악이 돋보인다. 예를 들어 '프스코프의 십자군' 장면에서는 다소 불쾌하기까지 한 금관과 타악기의 연주가 영화 속 독일 기사단에 대한 이미지를 잘 드러낸다.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1938년 12월 1일 공식 개봉한다.
3. 전쟁과 작곡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와 독일의 전쟁(독소전쟁)이 시작된다. 러시아 속담 중에는 "총이 말할 때 뮤즈는 침묵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전쟁 중 창작을 하는 것은 힘들다는 뜻이다. 그러나 독소전쟁의 상황은 속담과는 달랐다. 이 당시 러시아의 작곡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매우 많은 곡을 썼다.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음악은 전쟁 중 사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프로코피예프 역시 전쟁 중 수많은 곡을 썼다. 전쟁 중 프로코피예프가 작업하던 곡 중 대표적으로 발레 <신데렐라>, 영화 <이반 뇌제>가 있다. 발레 <신데렐라>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연관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1940년 레닌그라드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된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은 큰 성공을 거두고, 마린스키 극장과 프로코피예프는 후속 작품을 쓰기로 계약한다.
그들이 선택한 작품이 바로 동화 <신데렐라>이다. 프로코피예프가 한창 발레 <신데렐라>를 작곡하고 있던 무렵 전쟁이 발발하고, 작곡은 한동안 미뤄진다. 그가 다시 <신데렐라> 작곡으로 돌아온 것은 1943년 7월이 되어서이다. 그러나 초연까지의 과정은 또다시 험난하여 1945년 11월 21일에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된다.
두 번째로는 영화 <이반 뇌제>가 있다. <이반 뇌제>는 <알렉산더 네프스키>에서 만난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과 프로코피예프의 두 번째 협업이었다. 이반 뇌제, 즉 이반 4세는 강력한 전제 정권을 갖고 공포 정치를 행한 16세기 러시아의 차르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프로코피예프는 코카서스 지방의 날치크로 피난 갔다가 다시 트빌리시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이반 뇌제> 협업 제안을 받고 그는 에이젠시테인이 있던 알마-아타(현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향한다. 프로코피예프는 1942년 6월 알마-아타에 도착하지만 영화 <이반 뇌제> 작업은 발레 <신데렐라>와 같은 다른 작품 작업과 건강 문제 등 여러 상황들이 겹쳐 대략 1946년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치명적이었던 것은 영화의 개봉 금지 처분이었다.
이반 4세의 즉위와 카잔 정복 등을 다룬 <이반 뇌제> 1편은 1944년 개봉하고 1946년 소련 국가상(당시 이름 스탈린 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잔인함으로 악명 높은 이반 뇌제의 친위 부대 오프리치니크와 차르의 사촌 블라디미르를 죽이는 장면을 담은 <이반 뇌제> 2편은 1946년 3월 6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 반역사적이고 반예술적이라는 이유로 개봉 금지 처분을 받는다. 감독 에이젠시테인은 <이반 뇌제> 2편의 수정 작업을 진행하려 하지만 심장마비로 건강이 악화되어 스튜디오로 돌아가지 못한다. 결국 에이젠시테인은 1948년 2월 두 번째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영화 <이반 뇌제> 2편은 1958년에야 개봉한다. 계획 중이던 <이반 뇌제> 3편의 촬영 필름은 폐기된다.
그밖에도 프로코피예프는 전쟁 중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곡을 썼다. <신데렐라>와 <이반 뇌제> 이외에도 오페라 <전쟁과 평화>를 비롯해 실내악, 칸타타, <교향곡 5번>까지 다양한 곡이 이때 쓰였다.
4. 1948년
1945년 러시아는 승전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장밋빛 미래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 중에는 정부의 사상적 탄압이 느슨해져 작곡가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황에서 곡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정부는 다시 이데올로기 탄압의 끈을 조이기 시작했다. 이때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스탈린 말기 문화 이데올로기 분야의 감독을 맡은 안드레이 즈다노프이다.
문학계에서부터 시작된 탄압은 극장, 영화계로 이어지고 1948년 2월 10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음악계를 겨냥한 결의문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우정>에 관하여'를 발표한다. 이 결의문은 오페라 <위대한 우정>만 공격하는 글이 아니다. 1936년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에 가해진 비난을 다시 언급함은 물론이고, 공격 대상은 러시아 음악계 전체로 이어진다.
"특별히 나쁜 것은 형식주의적 반민족적 운동에 집착하는 작곡가들과 관련된 교향곡과 오페라 생산의 상태들이다. 이 운동은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셰발린, 포포프, 미야스코프스키 동무 같은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그 최악의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다."
-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우정>에 대하여', 문성호, 같은 출처, 124
결의문 발표에 곧이어 2월 17일부터 26일까지 음악가들이 모여 결의문의 내용에 대해 의논하는 회의가 이어진다. 프로코피예프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대신 서면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달한다. 편지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15-20년 전 내 음악에서는 몇몇 형식주의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아마 서구 유행과의 다소간 접촉을 통해 그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프라우다>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에 있는 형식주의 오류를 지적한 후, 나는 내 음악의 다양한 창작 방법에 대해 숙고하고, 내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 이후 이어지는 작품들(알렉산더 네프스키, 건배, 로미오와 줄리엣, 교향곡 5번)에서 나는 나 자신을 형식주의 요소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 1948년 2월 16일, 프로코피예프
형식주의자로 비난받은 작곡가들의 작품은 공연 및 출판이 금지되고 이는 곧 생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48년 2월 20일 프로코피예프의 아내 리나가 체포된다. 리나는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어 20년 노동 교화형을 선고받고, 노동 수용소에 갇힌다. 1956년 석방된 그는 1974년 이민이 허가되어 러시아를 떠나 1989년 1월 3일 런던에서 사망한다.
5. 악화되는 건강, 그리고
전쟁이 끝날 무렵 프로코피예프의 건강은 이미 위험 신호를 보낸다. 1945년 1월 그는 뇌진탕을 겪는다. 이후 프로코피예프의 건강은 주기적으로 악화되었다가 회복하길 반복한다. 그러나 프로코피예프의 작곡은 계속된다. 프로코피예프 말년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신포니아 콘체르탄테>가 있다.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는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프로코피예프와 로스트로포비치의 만남은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로스트로포비치는 프로코피예프의 <첼로 협주곡 1번(1938년작)>을 연주한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를 들은 프로코피예프는 첼로를 위한 곡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1949년 <첼로 소나타>를 완성하고, 이 곡은 1950년 로스트로포비치에 의해 초연된다.
이어서 프로코피예프는 <첼로 협주곡 1번>을 개작하여 <첼로 협주곡 2번>을 완성한다. 이 곡의 작곡 과정에는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도 어느 정도 참여했다고 한다. 1952년 2월 18일 로스트로포비치의 협연과 피아니스트 리히터의 지휘로 초연된 <첼로 협주곡 2번>은 후에 또다시 개작을 거쳐 지금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가 된다.
프로코피예프의 첼로를 위한 작곡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곧이어 <무반주 첼로 소나타>와 <첼로 콘체르티노> 작곡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두 곡은 모두 미완성으로 끝난다. 1953년 3월 5일 프로코피예프가 뇌출혈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은 날이기도 하다.
참고 자료
- David Nice, Prokofiev From Russia to the West 1891-1935, Yale University Press, 2003
- Simon Morrison, The People's Artrist : Prokofiev's Soviet Years,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 그레고리 하트 지음, 임선근 역, <프로코피예프, 그 삶과 음악>, PHONO, 2014
- 음악지우사 편, 음악세계 옮김, 프로코피에프, 음악세계, 2002
- 문성호, "소련의 음악정책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석사학위논문(2001),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 채혜연, "20세기 전반기 소련의 음악 : 정치·사회적 격변기의 모더니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음악", 박사학위논문(2005), 서울대학교 대학원
- <Three Oranges Journal>, Number16, 2009.05
이 글은 2019년 8월 6일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3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