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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자기 Oct 02. 2020

현실과 우리 사이엔 감정이 놓여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읽기

"현실과 우리 사이엔 감정이 놓여 있다."


며칠째 어디선가 본 이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대체 어느 책에서 본 문장이지? 최근에 읽었던 책들을 꺼내 뒤졌지만 찾지 못한 지 며칠.. 혹시나 해서 펼쳐본 한 책에서 드디어 문장의 출처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책은 바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였다.


해당 문장이 등장하는 책 구절을 인용하자면 이러하다.

"얼굴을 마주할 만큼 가까이 실제 현실에 다가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현실과 우리 사이엔 감정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역, 문학동네(2015), 25


나는 이 문장에 완전히 동의한다. 현실과 우리 사이엔 감정이 놓여 있다. 이 감정 때문에 나는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다. 그 현실은 작게는 하루하루의 일상이다. 그래서 내가 제일 그리기 힘든 장르가 바로 일상 만화이다.


그럼 아직 감정에서 걸러낼 수 없는 나의 현실에 관해서는 건너뛰고,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올해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를 뽑으라면 단연 두 사람이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다. 그의 책 중 처음으로 읽은 것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였다.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소전쟁에 참전한 여성 군인이라는 소재로 인하여 많은 관심을 받은 책이었는데, 사실 나는 이 책을 사고 완독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책은 시작부터 흥미로웠지만 나는 얼마 읽지 못하고 덮었다. 왜냐하면 처음에 이 책은 나에게 '전쟁 이야기'로 읽혔기 때문이다.


나는 전쟁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전쟁이라는 소재, 전쟁에서 사용되는 도구 등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서 온통 전쟁 이야기로 가득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처음엔 어떤 의미에서 지겨웠다. 


그런데 어떤 계기였는지는 잊었지만, 여하튼 올해 어느 시점에 나는 이 책을 다른 관점에서 새로 읽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관점이란 바로 '사람'이었다. 이 책을 '전쟁' 이야기가 아닌, 전쟁터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기 시작하니 책이 완전히 다르게 읽혔다. 책장은 술술 넘어갔고, 무엇보다 너무 슬펐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다 읽고, 나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다른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고아,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마지막 목격자들>, 아프간-소련 전쟁 참전 군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아연 소년들>,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체르노빌의 목소리>, 소련 붕괴 이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세컨드핸드 타임>이다. 이 다섯 권의 책을 묶어 '유토피아의 목소리' 5부작이라고 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에는 역사적인 사건을 마주하고 살아간 수많은 작은 인간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이 작은 인간들, 그러나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가 찾고 있는 '작으면서도 큰 사람'.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어?


나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는 항상 내가 역사를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 가물가물했다.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소위 말하는 '역덕'은 아닌 것 같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연도를 외우거나, 중요한.. 전쟁이 일어난 배경, 전개, 결과 혹은 중요한 경제 제도, 정책과 그 영향... 이 중요한 것들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꼭 집어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말하는 역사는 달랐다.

"나는 사건이 아니라 감정의 발자취를 좇는다. 사건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감정의 변화들을 주시한다. 내가 하는 이 일은 어쩌면 역사가의 작업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흔적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좇는 역사가다. 거대한 사건들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거대한 사건들은 역사 속으로 계속 전진해들어간다. 하지만 여기 이 작은 사건들, 그러나 작지만 작은 사람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이 사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중략)
과연 이런 사건이 역사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내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일은 늘 그렇듯 딱 한가지다. 나는 (책에서 책으로 넘어다니며) 필사적으로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린다. 역사를 사람의 크기로 작게 만드는 일."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아연 소년들>, 박은정 역, 문학동네(2017), 37-38


물론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역사가가 아니라 작가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말들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매일매일 지워버리고 싶은 나의 일상도, 누군가의 손에서 역사, 혹은 문학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니까. 만약 이런 역사라면 난 기꺼이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밑줄치고 싶은 문장에 포스트잇을 붙여놓는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에도 당연히 형형색색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있다. 그중 두 문장이 최근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어떻게 역사를 살면서 동시에 역사에 대해 쓴단 말인가?" 


"현재의 슬픔은 백 가지 반향을 일으킨다."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인용 출처>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아연 소년들>, 박은정 역, 문학동네(2017), 25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아연 소년들>, 박은정 역, 문학동네(2017), 26




2020.10.01.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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