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스타코비치의 음악원 졸업 작품 <교향곡 1번>
1919년 가을, 쇼스타코비치는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입학합니다. 그때 쇼스타코비치의 나이가 열세 살, 다른 음악원 학생들에 비하면 현저히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학장이던 작곡가 글라주노프는 쇼스타코비치가 자작곡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즉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원 입학을 허가합니다. 글라주노프는 쇼스타코비치가 작곡뿐만 아니라 피아노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쇼스타코비치는 이 두 전공으로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의 공부를 시작하게 되지요.
그리고 6년 뒤인 1925년, 쇼스타코비치는 작곡 전공 졸업 작품으로 <교향곡 1번>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 곡은 1년 뒤인 1926년 5월 12일, 니콜라이 말코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되고, 쇼스타코비치의 첫 번째 교향곡을 넘어 국내외에 작곡가로서 첫 명성을 안겨주는 곡이 됩니다.
그렇다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은 어떤 곡일까요? 열세 살에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한 쇼스타코비치는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을 성공적으로 발표했을까요?
음악원에서 공부가 시작된 1919년은 열세 살 쇼스타코비치에게 힘든 해였다고 합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집에서 음악원까지 가는 교통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집에서 음악원까지 4km가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또한 당시 음악원은 난방이 되지 않아서 학생들은 수업을 들을 때 코트를 입고 모자와 장갑을 모두 착용한 채로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혹독한 상황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수들까지도 수업에 빠지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기도 했겠지만, 어린 쇼스타코비치는 새로운 음악들을 접하고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성실히 음악원에 다녔다고 합니다.
음악원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작곡은 막시밀리안 슈타인베르크, 피아노는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에게서 배웠습니다. 그중 막시밀리안 슈타인베르크는 무려 40년 가까이 같은 음악원에서 교수로 일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사위이기도 하며, 림스키-코르사코프 계보의 러시아 음악의 전통을 계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1922년 2월, 쇼스타코비치의 가족에게 큰 불행이 찾아옵니다. 바로 쇼스타코비치의 아버지 드미트리 볼레슬라보비치 쇼스타코비치가 폐렴으로 갑자기 사망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쇼스타코비치의 어머니인 소피야 쇼스타코비치는 세 자녀(마리야, 드미트리, 조야 쇼스타코비치)를 경제적으로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소피야 쇼스타코비치는 처음에는 계산원으로, 이후에는 타자수로 일하기 시작했고,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던 쇼스타코비치의 누나인 마리야 역시 개인 피아노 과외를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1923년 피아노 전공을 졸업한 쇼스타코비치도 1924년 가을, 영화관에서 무성 영화 피아노 반주 일을 시작합니다.
삶은 힘들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원 수업을 따라가며 점차 전문 음악인의 세계에 발을 딛기 시작합니다. 그는 마린스키 극장의 단골이었고, 보리스 아사피에프, 블라디미르 쉬체르바초프, 니콜라이 말코 등 페트로그라드(1924년부터는 레닌그라드)의 음악가들의 정기 모임에 참여하며 스트라빈스키, 힌데미트, 쇤베르크의 새로운 곡들을 접하기도 합니다. 또한 1923년에는 처음으로 단독 리사이틀을 열기도 하지요.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원 시절 작곡한 곡으로는 3개의 환상적 춤곡(op.5), 스케르초 E♭minor (op.7), 피아노 삼중주(op.8), 등이 있으며 꽤나 괜찮은 곡들입니다.
한편 1924년 가을, 음악원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작곡 전공 졸업 작품으로 교향곡을 쓸 것을 요구합니다. 1924년 10월, 쇼스타코비치는 본격적으로 첫 번째 교향곡의 작곡을 시작하지요.
교향곡의 1악장과 2악장은 빠른 시간에 작곡됩니다. 1924년 12월 초에 쇼스타코비치는 첫 두 악장을 완성하여 모스크바에 있는 친구 레프 오보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전반적으로 나는 교향곡에 대해 마음에 들어. 나쁘지 않거든. 다른 어떤 것과 같은 교향곡이지만, 이건 '그로테스크 교향곡'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을 거야."
- 1924년 12월 4일, 쇼스타코비치가 레프 오보린에게 보내는 편지 중
편지 중 '그로테스크 교향곡'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많은 글들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묘사하는 말 중에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는데,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을 두고 벌써 이 단어를 사용하는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사실 쇼스타코비치의 곡을 '그로테스크'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조금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원 작곡 선생인 막시밀리안 슈타인베르크는 이미 이전에 쇼스타코비치가 쓴 곡들을 두고 그로테스크하다고 말했거든요. 바로 아래와 같이 말이지요.
"그(막시밀리안 슈타인베르크)가 말했어. '난 이런 음악을 두고 아무것도 할 말이 없어. 그로테스크에 대한 이 강박은 뭐지? 피아노 삼중주도 이미 어느 정도 그로테스크했어. 첼로 곡들도 그로테스크했고, 마침내 이 스케르초(op.7)도 그로테스크해!' "
- 1924년 2월 26일, 쇼스타코비치가 타티야나 글리벤코에게 보내는 편지 중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전통을 고수하는 슈타인베르크는 쇼스타코비치의 곡에서 벌써부터 무언가 그로테스크한 점을 발견하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에도 쇼스타코비치의 방향성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1924년 12월 레프 오보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쇼스타코비치는 1925년 1월에는 3악장을, 4월에는 마침내 마지막 4악장의 피아노 악보를 완성합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은 1925년 5월 6일 음악원 작곡 졸업 시험에서 쇼스타코비치와 친구 파벨 펠트가 두 대의 피아노 버전으로 연주합니다. 악보에 표시된 곡의 공식적인 오케스트레이션 완성 날짜는 1925년 7월 1일입니다.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가 이전까지 써왔던 피아노곡이나 실내악과는 다른 교향곡입니다. 19살의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이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공연이 되는 것을 꿈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바로 1926년 이루어지게 됩니다.
작곡 졸업 작품을 무사히 제출한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원에서 니콜라이 말코의 지휘 수업을 듣게 됩니다. 니콜라이 말코는 당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였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교향곡 1번 악보를 니콜라이 말코에게 보여주게 되고, 말코는 바로 이 곡을 공연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음악원의 작곡 교수 슈타인베르크와 지휘자 말코 모두 이 곡의 마지막 악장이 너무 빨라서 연주할 수 없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스무 살의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영화관 오케스트라에서 자신이 적은 템포로 연주할 수 있는 클라리넷과 트럼펫 연주자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1926년 5월 12일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 초연 날짜가 잡힙니다. 곡을 연주할 오케스트라는 니콜라이 말코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이지요.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공연을 보며 자라왔을 스무 살의 쇼스타코비치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대망의 1926년 5월 12일, 쇼스타코비치는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잔뜩 긴장된 마음으로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아 홀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어땠을까요?
공연은 성공적이었습니다. 2악장 스케르초는 앙코르 되었고, 청중들은 무대 위로 올라온 아직 소년기가 가시지 않은 스무 살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을 보며 더욱 감탄했다고 합니다.
공연이 끝나고 쇼스타코비치와 막시밀리안 슈타인베르크, 레오니드 니콜라예프, 니콜라이 말코는 쇼스타코비치의 집으로 가 공연의 성공을 축하했습니다.
초연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스무 살, 곡을 완성할 당시에는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홀에서의 성공적인 첫 번째 교향곡 초연은 당시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쇼스타코비치의 인생에서 잊지 못한 사건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1번>이 초연된 1926년 5월 12일을 자신의 '두 번째 생일'로 특별히 기억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은 어떤 곡일까요?
이 곡은 4악장의 교향곡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1악장은 약음기를 낀 트럼펫의 연주로 시작되며 목관, 현으로 주제가 이어지는데, 반복되며 펼쳐지는 1악장의 주제는 20세기 초반의 근대적으로 발전하는 도시 사회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쇼스타코비치의 다른 교향곡에서도 그렇듯이 금관악기의 사용이 인상적인데, 초연 당시 원래 공연 날짜는 5월 8일로 잡혔지만 그 날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금관 연주자들이 마린스키 극장에서 '살로메' 공연을 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5월 12일로 공연이 미루어졌다는 뒷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2악장 스케르초는 풍자적인 악장입니다. 특히 이 악장에서는 중간중간 피아노가 치고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더욱더 곡의 생동감을 더해주며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 줍니다. 저는 2악장의 피아노 연주 부분을 좋아해서, 2악장을 들을 때면 항상 피아노가 나오는 부분을 기다리게 됩니다. 빠르고 경쾌한 피아노 연주 부분은 1920년대 영화관에서 무성영화 반주 일을 하던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또한 2악장 스케르초는 초연 당시 앙코르가 되었던 악장이기도 하지요.
쇼스타코비치는 1,2악장을 완성하고는 친구에게 '이 곡은 그로테스크 교향곡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거야.'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떠신가요? 여러분이 듣기에도 이 곡은 그로테스크 교향곡이라는 말이 어울리나요?
이어지는 3악장은 앞의 두 악장과 다른 느린 악장입니다. 초연 당시 이 3악장을 두고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의견이 있었습니다. 서정적인 표현은 아직 쇼스타코비치의 영역은 아니라는 의견 등이었지요. 그러나 3악장을 계속 듣고 있다 보면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다른 교향곡에서 펼쳐지는 느린 악장들의 풍부한 서정성을 이미 어느 정도 볼 수 있습니다. 곡을 쓸 당시 쇼스타코비치가 19살이었던 것을 생각해보아도 이렇게 풍부한 선율로 서정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지요.
3악장 마지막 타악기의 트레몰로는 쉬지 않고 곧바로 4악장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3악장의 느린 부분을 이어받다가 빨라지고는 피아노가 잠시 등장하고, 이어서 오케스트라가 총동원되어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1926년 5월 12일 성공적인 초연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서의 초연 이후 곡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모스크바 초연을 갖습니다. 이어서 쇼스타코비치는 니콜라이 말코와 함께 <교향곡 1번>과 피아노 공연을 하러 지방의 도시로 투어를 떠나기도 합니다. 덕분에 쇼스타코비치는 연주비를 벌 수 있게 되지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은 소련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명성을 얻게 됩니다. 1927년 3월에는 베를린에서 브루노 발터가, 이어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오토 클렘퍼러와 같은 세계적인 지휘자들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을 연주합니다. 스무 살 작곡가의 곡을 세계적인 지휘자들이 연주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지요. 그만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은 완성도 높으며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생동력이 넘치는 곡입니다.
후에 쇼스타코비치는 14개의 교향곡을 더 작곡해서 총 15개의 교향곡을 작곡합니다. 15개의 교향곡들은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서 작곡되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과 삶을 알아보는 다양한 방법 중 1번부터 15번까지 교향곡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좋은 길입니다.
그 첫 번째인 <교향곡 1번>. 열아홉 살 쇼스타코비치의 졸업 작품이자, 쇼스타코비치에게 두 번째 생일을 안겨준 이 곡을 5월 12일을 맞아 들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문헌
- Laurel Fay, Shostakovich : A Life,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 Elizabeth Wilson, Shostakovich : A Life remembered, faber and faber, 2006
- 음악지우사 편, 음악세계 옮김, 쇼스타코비치, 음악세계,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