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스타코비치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지난 글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의 내용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1934년 초연된 이 오페라는 소련 국내와 해외 모두 큰 성공을 거두며 1936년 1월까지 활발히 공연됩니다. 그러나 1936년 1월 28일 일간지 <프라우다>에 실린 한 기사가 이 오페라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습니다. 바로 '음악 대신 혼돈'이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익명의 글이었지만 <프라우다>에 실린 이상 당의 입장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 오페라는 1936년 1월 이후 1963년 초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라는 수정본으로 다시 공연되기까지 소련에서 공연되지 않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렇게 <프라우다>에 '음악 대신 혼돈'이라는 기사가 실리게 된 전후 사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어떻게 해서 소련 최고의 오페라라 불리며 국내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는 하루아침에 '형식주의', '싸구려 광대 짓', '가장 천박한 종류의 자연주의'라는 말로 공격받으며 쇼스타코비치의 인생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게 되었을까요?
그 앞뒤 사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1920년대와 1930년대 소련 음악계의 변화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1920년대 소련의 음악계, 예술계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1920년대 러시아 예술계에 아방가르드, 구성주의가 유행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대표적인 러시아 구성주의 작가로는 알렉산더 로드첸코가 있습니다. 1924년 만들어진 로드첸코의 아래 포스터는 러시아 구성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1920년대 러시아 음악계의 대표적인 구성주의 작품으로는 작곡가 알렉산더 모솔로프의 '주물 공장'이 있습니다. 이 곡은 공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소리들을 음악으로 표현한 생생한 작품입니다.
이렇게 1920년대 러시아에 아방가르드, 구성주의가 유행한 것에는 국내외 예술 사조의 흐름도 있겠지만 정치적인 배경을 빼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인물은 바로 1917년부터 1929년까지 계몽인민위원회를 맡았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입니다. 루나차르스키는 예술을 획일화가 아닌 다양성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1920년대 러시아의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문화정책을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18년 프로코피에프가 러시아를 떠날 때 서류를 써준 사람도 바로 이 루나차르스키입니다.
또한 1921년부터 1928년까지 진행된 러시아의 신경제정책(NEP)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전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했던 신경제정책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따라서 다른 시기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의 음악가들은 유럽의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음악들을 접할 기회가 늘어났고, 1920년대 러시아의 음악계에는 1930년대 이후에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음악들이 작곡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계의 흐름을 대표하는 단체로 1923년 모스크바에서는 '현대음악협회(ACM)'이 창단됩니다. 이어서 1926년에는 현대음악협회의 레닌그라드 지부인 '레닌그라드 현대음악협회'가 세워지며, 1926년 5월 12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번> 초연은 바로 이 레닌그라드 현대음악협회가 후원한 음악회였습니다. 이후에도 현대음악협회는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등 유럽의 모더니즘 음악을 러시아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며 1920년대 러시아 현대 음악 발전에 큰 역할을 합니다.
한편 현대음악협회가 창단된 같은 해인 1923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가협회(RAPM)'가 설립됩니다.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가협회(줄여서 '러프로음협')은 현대음악협회와 그 방향성에 있어 대비되는 단체였습니다. 러프로음협은 서구 모더니즘 음악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음악이라고 비판하며, 프롤레타리아가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작곡할 것을 주장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주도권을 위한 배타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1920년대 러시아 음악계는 크게 '현대음악협회'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가협회' 두 단체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920년대 역시 예술에 대한 당의 통제와 검열이 존재했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가진 단체가 공존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1929년, 러시아의 음악계의 주도권은 사실상 러프로음협이 갖게 되는 듯합니다. 여기에는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의 정권 장악, 1928년 제1차 경제개발정책의 시작, 1929년 루나차르스키의 사임 등의 배경이 있습니다. 변화하는 정책 속에 당의 지지를 힘입은 러프로음협은 음악계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얻으며 서구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음악, 재즈, 나아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이질적이라고 판단한 바흐, 베토벤, 리스트, 라흐마니토프, 스크리아빈 등의 음악 역시 공격합니다.
그러나 러프로음협의 독주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1932년 4월 24일 당 중앙위원회는 "문학과 예술 조직의 재건설에 관하여"라는 결의문을 발표하며, 프롤레타리아 단체를 포함한 모든 예술 단체의 해산을 결의합니다. 이후 예술의 각 분야에는 단 하나의 단체만이 존재하게 되는데, 음악계에서는 작곡가, 음악학자, 비평가, 이론가 등이 참여한 '소련 작곡가 동맹'이 만들어집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가 완성된 것은 바로 이 1932년입니다. 러프로음협이 해체되고 소련 작곡가 동맹이 설립되던 시기이지요.
1932년 러시아의 작곡가들은 소련 작곡가 동맹의 설립을 환영했다고 합니다. 극단적이었던 러프로음협으로부터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지요. 쇼스타코비치도 아마 어느 정도 이런 생각 속에서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를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페라는 1932년 12월 완성되고, 1934년 1월 레닌그라드 말리 극장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둡니다.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가 초연된 같은 해인 1934년, 제1차 소련 작가 동맹의 총회에서는 지난 2년간의 토의 끝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방법론이 소련 예술의 표준으로 선포됩니다. 이것은 이어서 다른 예술계로 이어지고 음악계 역시 마찬가지이죠. 이때 발표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이후 소련 예술계를 단단히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36년 1월이 찾아옵니다.
1935년 12월 볼쇼이 극장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의 새로운 제작 공연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1936년 1월 26일, 연주 여행을 위해 모스크바에 와있던 쇼스타코비치는 그날 밤 볼쇼이 극장의 <레이디 맥베스> 공연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지시를 받고 볼쇼이 극장으로 향합니다. 그날 밤 <레이디 맥베스> 공연에는 아주 특별한 관객이 찾아왔거든요.
1936년 1월 26일 볼쇼이 극장의 특별 박스석에 앉아 있던 사람은 바로 스탈린, 몰로토프, 미코얀, 즈다노프였습니다. 커튼 뒤에 앉아있던 스탈린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날 공연에 있던 목격자는 타악기와 금관악기가 포르티시모를 연주할 때마다 즈다노프와 미코얀이 웃으며 스탈린을 향해 뒤돌아보았다고 회상합니다. 1막 마지막의 카테리나와 세르게이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더욱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공연이 모두 끝나기 전에 스탈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을 나간 것입니다. 쇼스타코비치는 불길한 예감을 안은 채 다음 연주 여행 도시인 아르한겐스크로 떠납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참담한 기분은 그가 친구 이반 솔레르틴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탈린 동지, 몰로토프 동지, 미코얀, 그리고 즈다노프 동지가 모두 자리에 있었네. 공연은 아주 잘 진행되었어. 공연이 끝나고 나는 무대 위로 불려 나가서 인사를 했어. 나는 오직 내가 3막이 끝나고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었지. 상심을 느끼며, 나는 내 가방을 챙겨 들고 역으로 향했어... 나는 매우 기분이 안 좋아. 자네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자네와 이름이 같은 사람에게 일어났지만,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네." - 쇼스타코비치가 이반 솔레르틴스키에게 보낸 편지 (1936년 1월 28일)
볼쇼이 극장에서의 공연이 있은 이틀 뒤, 마침내 일간지 <프라우다>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를 강하게 비난하는 글 '음악 대신 혼돈'이 실립니다. 기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의 작곡가는 그의 인물들에 '격정'을 부여하기 위해 째즈로부터 그 안절부절못하고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발작적인 음악을 가져왔다. 우리의 음악 비평가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맹세한 반면,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에서의 무대는 가장 천박한 종류의 자연주의를 우리에게 제공하였다. - 1936년 1월 28일, 프라우다 '음악 대신 혼돈' 중
위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기사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는 소련 예술계의 단 하나이자 최고의 방법론으로 채택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아닌, '가장 천박한 종류의 자연주의'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습니다. 이 기사의 다른 부분은 어떨까요?
이는 고전적 오페라를 기억나게 할 어떤 것도 없고, 교향곡 음악이나 모두에게 이해될 수 있는 단순하고 대중적인 음악 언어와 공통점을 가지는 어떤 것도 없도록 고의적으로 왜곡된 음악이다. 이 음악은 오페라를 거부하는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인데, 즉 '좌파' 예술이 극장에서 단순성, 리얼리즘, 이미지의 명료성, 그리고 자연스러운 언어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기초이다. ...(중략)... 여기에는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음악 대신 '좌파주의자'의 혼돈만이 있다. 대중을 감화시키는 좋은 음악의 힘은 싸구려 광대 짓을 통한 독창성을 창조하려는 쁘띠 부르주아, '형식주의자'의 시도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 게임은 매우 안 좋게 끝날 것이다. - 1936년 1월 28일, 프라우다 '음악 대신 혼돈' 중
'단순하고 대중적인 음악 언어', '리얼리즘', '이미지의 명료성', '자연스러운 언어'는 모두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지향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기사 속 쇼스타코비치의 <레이디 맥베스>는 이러한 것을, 즉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방법론을 거부한 '형식주의자'의 시도라고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공격은 계속됩니다. <프라우다>에는 이어서 1936년 2월 6일, 쇼스타코비치의 발레 <맑은 시냇물>을 비난하는 기사 '발레의 허위'를 냅니다.
1935년 초연된 발레 <맑은 시냇물>은 집단 농장을 배경으로 한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밝고 경쾌한 발레이지요. <맑은 시냇물>은 배경과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의 집단 농업화를 선전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정작 당에 의해 '집단 농장의 현실에 대해 거짓되게 이해하고 있다.', '충분한 조사를 하지 않았다.' 등의 이유로 비난을 받습니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반인민적', '형식주의자'라는 비난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비난 속에 결국 쇼스타코비치는 1936년 12일 예정된 공연의 리허설을 진행 중이던 <교향곡 4번>의 초연을 취소합니다.
그렇다면 당이 원했던 음악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 힌트는 <레이디 맥베스>와 같은 시기 볼쇼이 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던 또 다른 오페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36년 1월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의 <레이디 맥베스>를 보기 며칠 전, 같은 볼쇼이 극장에서 공연 중이던 이반 제르진스키의 오페라 <고요한 돈강>을 관람합니다. 이 오페라는 숄로호프의 소설 <고요한 돈강>을 원작으로 한 것으로, 스탈린은 공연 휴식시간에 작곡가 이반 제르진스키를 불러 격려했다고 합니다. 이는 스탈린이 <레이디 맥베스>를 끝까지 보지 않고 극장을 나간 것과 대비되지요. (쇼스타코비치가 이반 솔레르틴스키에게 보낸 편지 중 '자네와 이름이 같은 사람에게 일어났지만,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 역시 바로 이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어서 <프라우다>는 제르진스키의 오페라 <고요한 돈강>에 우호적인 기사를 냅니다. 오페라 <고요한 돈강>은 알아듣기 쉬움, 단순함, 민요와 대중적인 노래 및 춤의 사용 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방법론과도 부합하며 다른 어떤 소련 오페라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받습니다.
따라서 같은 시기 공연되었으며, 스탈린이 관람했지만, 정반대의 평을 받은 두 오페라를 비교해보면 쇼스타코비치의 <레이디 맥베스>가 왜 비난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와 이반 제르진스키의 오페라 <고요한 돈강>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소련 예술의 유일하고 최상의 방법론에 비추어 그 평가가 나뉜 것입니다. 하나는 형식주의자의 싸구려 광대짓으로, 다른 하나는 소련 최고의 오페라로 말이지요.
지금까지 두 번에 나누어서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의 내용과 왜 이 작품이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는 이렇게 쇼스타코비치의 인생에 크나큰 흔적을 남긴 작품임과 동시에 쇼스타코비치가 큰 애정을 갖고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당시 레닌그라드를 떠나 피난을 가던 쇼스타코비치의 가방에 들어있던 악보 중 하나가 바로 오페라 <레이디 맥베스>의 원본이었습니다. 또한 1963년 1월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라는 이름으로 다시 공연되기까지의 과정 역시 우여곡절의 연속으로, 더욱더 쇼스타코비치가 이 작품에 가진 애정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꼭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를 접해보시길 추천해드립니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원작 소설을 읽어보시는 것도,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로 접하는 것도, 혹은 영화로 접해보는 것도 모두 좋습니다.
참고 문헌
- 문성호, "소련의 음악정책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예술전문사 석사학위논문(2001)
- 채혜연, "20세기 전반기 소련의 음악 : 정치·사회적 격변기의 모더니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음악",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 채혜연, "1930년대 소련 음악 -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어노문학 21(4), 2009
- 다큐멘터리 <Shostakovich Against Stalin - The War Symphonies>, Larry Weinstein, 1997
- Elizabeth Wilson, Shotakovich - A Life Remembere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6
-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M.T.앤더슨, 장호연 역, 돌베개,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