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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자기 May 19. 2019

부활과 불멸의 장소, 박물관

안톤 비도클 <모두를 위한 불멸 : 러시아 우주론 3부작> 관람기

당신은 박물관, 혹은 미술관을 좋아하는가?

나는 좋아한다. 그것도 꽤나 많이. 


물론 박물관을 가는 것은 힘들다. 

일단 박물관은 넓다. 즉, 다리가 아프다. 

또한 박물관 특유의 훵하고 경직된 분위기와 빽빽하게 늘어선 전시물들은 심리적인 압박감마저 갖게 만든다. 

때때로 전시를 보는 것이 마치 숙제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긴 학창 시절 박물관, 미술관 가기는 단골 숙제였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내게 전시 관람 숙제를 내주시는 선생님은 없다. 이제 나는 내가 원해서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소는 지금의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만약 박물관이 없었다면?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3층 도자공예실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안톤 비도클의 <모두를 위한 불멸> 전은 박물관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러한 내 감정을 콕 집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전시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모두를 위한 불멸> 전에서는 총 세 개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전시 소개에 나오는 작품의 순서는 이렇다.

1. 이것이 우주다 (2014년)

2. 공산주의 혁명은 태양에 의해 일어났다 (2015년)

3. 모두를 위한 부활과 불멸! (2017년)


그러나 실제로 전시장에 들어가면 관람객이 마주하는 영상의 순서는 이러하다.

1. 모두를 위한 부활과 불멸! (2017년)

2. 공산주의 혁명은 태양에 의해 일어났다 (2015년)

3. 이것이 우주다 (2014년)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영상 <모두를 위한 부활과 불멸!> 은 바로 박물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영상에는 러시아의 다양한 박물관, 미술관들이 등장한다. 모스크바 동물박물관, 트레챠코프 갤러리, 레닌 도서관, 혁명 박물관 등등...  영상의 색감은 마치 액침표본의 용액 속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쓸쓸하면서도 정적이고 늪처럼 축축하다.


영상의 첫 장면은 모스크바 동물박물관에서 동물 박제들을 보는 사람들을 담고 있다. 카메라는 그들을 스쳐 지나간다. 다양한 인물들이 전시창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중 공작의 화려한 깃털을 쓰다듬는 손짓을 하고 있는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 그의 손짓은 박물관의 박제가 아닌, 예전에 알고 있던 친근한 무언가를 쓰다듬는 것 같다. 


이어서 트레챠코프 갤러리에 전시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돋보기로 관찰하는 한 사람이 나온다. 그의 뒤에 선 또 다른 사람은 아이폰으로 <검은 사각형>을 찍는다. 


<모두를 위한 부활과 불멸!>, 안톤 비도클, 2017년


영상은 대개 이러한 식이다. 박물관, 갤러리 혹은 도서관에서 전시물을 관람하고 책과 자료들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공간들은 모두 과거의 무언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죽은 사람들이 남긴 무언가 이거나 죽은 동물, 혹은 죽은 사람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영상에서 다루고 있는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은 어떤 면에서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영상의 요지는 죽음이 아닌 부활이다. 내레이션은 말한다. 


박물관은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장소이다.






 박물관은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장소이다.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박물관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목적 중 하나는 유물의 보존이다. 만일 박물관이 없었다면 지금 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는 수많은 유물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잊히고 사라졌을 것. 이미 생명력을 소진하고 죽음을 맞이했을 것에 박물관은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거대한 수장고 속의 한편에, 전시창 안에. 이렇게 이미 죽은 유물들은 박물관에서 다시 태어난다. 즉, 부활하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 멸종된 종인 매머드. 지금은 뼈만 남은 채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이것은 박물관이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모두를 위한 부활과 불멸!> 영상에서 인상 깊었던 또 다른 구절은 박물관은 복수를 원하는 자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는 것이다. 


인간은 크고 작은 갈등을 만들어낸다. 갈등이 쌓이고 쌓여 싸우고, 서로를 죽이고, 원한을 갖게 되고,  복수한다. 여기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복수는 또 다른 원한을 만들고, 이것은 다음 세대로, 그다음 세대로 수십, 심하면 수백 년간 이어질 수도 있다.


싸움의 단위가 커지면 전쟁이다. 물론 전쟁 역시 종전되었다고 모든 감정이 청산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간의 원한은 수십, 수백 년 동안 지속된다. 후손은 윗 세대의 원한을 갚겠다고 복수를 꾀한다. 우리는 이것을 주위에서 너무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박물관은 복수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서로 원수인 이들을 나란히 세워놓을지언정 복수를 위한 기회를 주진 않는다. 전시창 안, 죽은 미라들이 일어나 싸울 수는 없다. 박제된 치타가 달려가 박제된 임팔라를 잡아먹을 수도, 반대로 박제된 임팔라가 깨어나 박제된 치타를 밟아줄 수도 없다.


박물관이 부여한 새로운 생명은 복수, 갈등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가 함께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죽음, 혹은 공멸로 가는 길을 박물관은 허락하지 않는다. 박물관에서는 모두가 함께 부활한다. 내레이션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불멸을 향한 길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전시실에서는 두 번째 영상 <공산주의 혁명은 태양에 의해 일어났다>를 볼 수 있다. 이 영상은 소련의 생체 물리학자인 알렉산더 치제프스키의 태양 우주론을 다루고 있다. 내용 중 태양의 흑점 활동이 활발해지는 시기와 인류사를 연관 지어서 설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래이다. 탄광촌으로 보이는 곳 한가운데에 우뚝 선 별을 비추는 이 장면은  같은 영상이 처음과 마지막에 두 번 나온다. 그러나 내레이션은 각각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공산주의 혁명은 태양에 의해 일어났다>, 안톤 비도클, 2015




 이 영상을 지나면 마지막으로 <이것이 우주다>라는 영상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우주다>, 안톤 비도클, 2014

붉은 화면에 자막이 나온다. 

"이것은 우주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속 그 유명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그다음 이어지는 말은 무엇일까? 


이 붉은색은 방사선 치료실의 붉은 빛으로 몸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뭐라고?



물론 <이것이 우주다>는 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이것이 우주다>는 러시아 우주론은 창시한 철학자 니콜라이 페도로프의 다음 글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우주의 에너지가 불멸하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조상들을 숭배하기 때문에, 진정한 사회적 평등은 모두를 불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위의 글은 <공산주의 혁명은 태양에 의해 일어났다>와 <모두를 위한 부활과 불멸!>에서도 등장한다. 


나는 러시아 우주론에 대해 알지 못하고, 페도로프의 저 문장에 대해서도 크게 공감할 수 없다. 그러나 안톤 비도클의 <모두를 위한 부활과 불멸!>이 담고 있던 박물관의 역할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부활의 장소로서 박물관에서 대한 <모드를 위한 부활과 불멸!>의 시각은 물론 페도로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아래는 1874년 페도로프가 루미얀세프 박물관 도서관에서 일을 시작하고 쓴 글이라고 한다.


"아카이브를 무덤과 비유할 때,

독서는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

연구는 묘지발굴을

향한 과정이 될 것이며

전시는, 언제나 그랬듯이,

부활이 될 것이다."

- 니콜라이 페도로프


첫 번째, 두 번째 전시실 사이에 러시아 우주론 연보를 전시해놓은 공간이 있다. 위의 글 역시 이곳에서 찾은 것이다






안톤 비도클의 <모두를 위한 불멸> 전시는 미술관에서, 영상 <모두를 위한 부활과 불멸!>의 요지를 빌리자면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장소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서 '죽은 이들'은 러시아 우주론을 만든 니콜라이 페도로프일 수도 있고, 러시아 우주론을 주장했으나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잊힌 또 다른 철학자, 괴짜 과학자들일 수도 있다. 


이미 죽은 이들은 안톤 비도클의 <모두를 위한 불멸> 전시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들의 이상은 전시실에 살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 특이하지만 흥미로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만약 당신이 관조를 넘어 그들을 응시한다면 그들은 어쩌면 불멸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를 위한 부활과 불멸!>, 안톤 비도클, 2017년

전시정보

<안톤 비도클: 모두를 위한 불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6전시실

2019.4.27 -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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