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산 지 열 달째. 이제 리지는 다양한 애칭으로 불린다. 가장 많이 불리는 애칭은 리지와 귀염둥이의 합성어인 ‘리둥이’. 리지는 앉으나 서나 걸으나 누우나 귀엽기 때문이다. 그 밖엔 참치만 고집하는 식성 때문에 ‘편식둥’ 혹은 ‘고집둥’, 바닥에 털썩 잘 눕곤 해서 ‘털썩둥’, 발라당 누워 쓰다듬을 받길 좋아해서 ‘발라당이’, 투명 반구에서 창밖을 보며 멍 때리길 좋아해서 ‘반구쟁이’, 캔을 딸 땐 갑자기 엉덩이를 착 우리 종아리에 대는 애교를 선보여서 ‘엉착이’, 똥냄새가 심해서 ‘똥쟁이’, 놀아달라며 옆에 와서 잘 꿍얼거려서 ‘꿍얼이’, 가끔 깨물고 도망가서 ‘난폭둥’으로도 불린다.
우리 사이에서만 통하는 은어도 많이 생겼다. 사냥감이 매달린 낚싯줄을 휙휙 빠르게 움직여주는 사냥놀이는 ‘휘리릭이’, 발톱을 깎기 위해 리지를 안아 올려 츄르로 달래는 것은 ‘둥가둥가’, 양치 훈련은 ‘찌까(치카)’…. 사전엔 없지만 우리 집에선 어떤 단어보다 자주 쓰이는 말들이다.
리지는 우리 집에서 언어 뿐 아니라, 존재감도 지배한다. 단적으로, 이제 우리 집 방 중에서 리지의 물건이 없는 방은 없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건 리지의 갑작스런 탈출을 막기 위해 설치한 하얀 방묘문이며, 거실엔 캣타워, 캣터널, 미끄럼 방지 매트, 이동장이 인테리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안방 장롱 안과, 작은방의 리빙박스 안엔 색색의 고양이 장난감이 그득그득하다.
리지는 고양이를 키운다는 건 집에 복숭아뼈 주변을 돌아다니는 귀여운 솜뭉치가 하나 생기는 것 이상의 큰 변화가 생긴다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고양이는 인간과 종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기 때문에 고양이의 기분과 건강 상태를 파악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든다. 랜선 집사 시절엔 내가 원할 때, 원하는 고양이 짤을 클릭해 귀여움을 감상하면 끝이었지만, 현장 집사가 되고 나니 그 귀여움을 유지해주기 위해 많은 체력과 이해력과 자본(!)이 들어간단 걸 알게 되었다. 매일 생기는 새로운 질문에 고군분투하면서.
어떤 질문은 고양이란 종의 공통 특성에 기인해 검색 몇 번으로 답이 나오지만, 어떤 질문은 리지만의 특징이라 시간을 두고 리지를 지켜봐야만 답이 나온다. 어떤 질문은 리지의 엉뚱한 행동 때문에 생겨(예를 들면, 자기 꼬리를 사냥감으로 착각해 잡으려고 빙빙 돌며 애쓰는 모습) “큭큭, 왜 저래?”하고 웃고 넘기면 되지만, 어떤 행동은(예를 들면, 화장실을 갑자기 안 쓰는 것) “아이고, 어디 아픈가?”하며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물음표를 만나고, 붙드는 동안 심장 저릿한 감동부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괴로움까지 다이나믹한 감정의 기복을 경험해 왔다. 좀 초연해진 면도 있다(그래, 탁구공은 ‘발리슛’하기 좋은 각도로만 주란 거지? 알았다…).
리지에 대한 궁금증에 얽힌 에피소드를 가끔 핸드폰 메모장 앱에 적어두었다. 남편에게 “리지 전에 웃겼던 거 기억나?”하며 같이 킬킬대는 용도나, SNS에 올려 지인들을 웃기는 용도로 야무지게 활용했다. SNS에서 리지의 웃김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내가 남사스러운 것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리지를 부를 때 ‘리지야’는 괜찮은데 ‘울애기’는 차마 못 하겠다. 친구가 날 ‘리지맘’이라 불러줄 땐 마음 어딘가 슬며시 미소가 지어져서 좋지만, 막상 내가 ‘나 리지맘이야’ 하기엔 손발이 오그라든다. 리지를 사랑하지만 ‘리지야 사랑해’는 잘 못하겠고, 리지 SNS 게시물에 귀여운 멘트나 하트 이모티콘은 잘 못 붙이겠다(예로 난 벚꽃이 아무리 예뻐도 ‘꺅♡♡♡ 핑꾸핑꾸 넘 이뿌♥’라고 쓰는 사람은 못 된다…). 대신 거실 햇살 아래 잠든 리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올리면서도, 막상 글은 ‘햇살 무엇’이라고 올리는 소심한 사랑꾼이다.
아무튼 리지를 속으론 사랑스럽다거나 귀엽다거나 웃기다고 느꼈던 에피소드들이 꽤 모이자, 어느 날 이것들을 에세이로 묶어서 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평소 글쓰는 것을 좋아했고, 언젠가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의 반려동물 에세이, <개와 고양이를 키웁니다>와 같이 위트와 통찰력과 귀여움이 삼박자로 담긴 글을 쓰면 뿌듯할 것 같았다.
이후 매 에피소드를 A4 두 쪽 정도의 분량으로 꾸준히 써 나갔다. 주로 왕복 3시간이 걸리는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그리곤 이 시리즈에 ‘물음표의 숲’이란 제목을 붙여주었다.
글은 리지에 대해 썼지만, 결과적으론 나에 대해 쓴 거란 생각도 든다. 새로운 존재가 인생에 출현했을 때 내게 일어나는 변화, 그 변화를 잘 유지하기 위한 내 노력과 좌절, 그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내 이해와 오해를 주로 다루었으니까.
오늘도 주로 우리의 보호 아래에 있지만, 종종 우리의 머리 위에서 우리를 갖고 노는 리지를 보며 새로운 물음표를 붙들고 씨름한다. 리지가 길에서 지낸 시간보다 우리와 함께한 시간이 더 길어진 만큼, 이젠 우리에게 대하는 행동에서 새로운 물음표가 속속 생겨나는 중이다(리지야, 방금 나 노려보면서 꿍얼꿍얼댄 건 놀자는 정중한 제안이지? 명령 아니지?).
서툴지만, 앞으로도 리지가 만드는 무성한 ‘물음표의 숲’을 계속 헤매 볼란다. 숲에 주저앉았을 때 묻은 흙도 곧 훌훌 털고 일어나게 할 만큼, 어쨌든 리지는 귀여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