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도 가끔 집을 벗어나고 싶다
그럼 리지는?
“펫시터님이 와서 봐주세요.”
괜찮다는 듯 마련한 ‘묘책’을 답했지만, 실은 속내가 복잡했다. 죄책감 80%, 안도감 20%로 이루어진 감정의 원그래프가 마음속에 생겨나며 나를 질책했으니까. ‘어쨌든 너의 즐거움을 리지의 외로움보다 우선시한 거네.’라면서.
그때그때 리지의 상태에 따라 내 기분은 시소처럼, 상반된 감정 중 어느 한 쪽 편으로 훅 기울었다. 예를 들면 죄책감과 당당함 사이에 생긴 시소는, 리지가 놀아달라고 칭얼댈 땐 ‘혼자 있으면 얼마나 심심해할까’란 생각에 죄책감 쪽으로 훅 기울었고, 여행지 소개 TV 프로그램을 볼 땐 ‘캔 값 버느라 고생한 나님 떠나자!’하며 당당함 쪽으로 훅 기울었다. 미안함 vs 고마움, 불안감 vs 안도감, 책임감 vs 자유로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소는 수없이 갈팡질팡했다.
그런데 이번 여름 휴가 땐 해외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예약금까지 걸어 둔 이탈리아 신혼여행을 취소해야 했고, 이후 약 3년 간 남편과 해외여행을 한 번도 못 가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과 여름 휴가 계획을 세우다 보니 성묘가 집에 혼자 있을 수 있는 기간은 최대 3일이란 글에 막막했다. 고양이 호텔링도 알아보았지만, 고양이는 자기 영역 안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 영역동물이다. 특히 ‘쫄보’인 리지는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았다. 베스트는 누군가 집에 와서 리지를 케어해주는 것. 그런데 가족도, 지인도 멀리 살아서 부탁을 하기 어려웠다.
‘펫시팅’이라는 한 줄기 빛을 만난 건 옆 팀 책임님의 SNS였다. 여행을 떠난 책임님의 두 고양이가 집에서 펫시터님의 케어를 받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다. 펫시터님이 흔드시는 장난감을 툭, 툭 건들고 놀거나 편안히 잠든 두 고양이의 사진 위로 ‘나보다 사진 더 잘 찍으시는 돌봄 선생님’ 같은 문구도 써 있었다. 이거다! 바로 그 장면을 캡쳐해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남편도 안색이 밝아졌다.
“리지가 집에서 케어를 받을 수 있으면 훨씬 안정적일 것 같아.”
다음 날, 난 책임님께 궁금한 점들을 여쭤보았다. 특히 돌봄 영상 이야기가 여러 걱정을 내려놓게 했다.
“펫시터님이 캠으로 케어하시는 모습을 쭉 촬영해주시거든요. 나중에 케어 처음부터 끝까지 찍힌 영상을 전부 볼 수 있어요.”
영상은 고양이가 건강히 잘 지내는지, 여전히 귀여운지(!) 확인하게 해 줌과 동시에, 혹시 모를 사건 사고가 일어났을 때 서로 오해가 안 생기게 해 줄 귀중한 자료였다.
아쉽게 책임님이 추천하신 ㅂ사에선 8월 휴가 날짜엔 파견 가능한 펫시터님이 안 계셨다. 우린 검색 끝에 ㄷ사의 펫시팅을 예약했다. 추가로 리지가 펫시터님과 잘 지낼 수 있을지 사전 테스트도 해보기로 했다. 마침 1박 2일로 부모님 댁에 다녀올 일이 있던 6월 말의 한 일요일로. 30분 돌봄 비용은 20,000원이었다. 기본으로 사료 및 간식 급여(식기세척 포함), 배변 및 환경정리가 포함되어 있었고, 필요 시 약 급여나 실내 놀이를 요청할 수 있었다.
드디어 돌봄 전날, 남편이 임시로 바꿔 준 도어락 비밀번호를 앱에 남긴 후(번호는 펫시터님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난 남편과 돌봄 요청사항, 돌봄 용품 위치를 상세히 적은 문서를 프린트 해 식탁에 올려 두었다. 참고하실 집사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아래에 내용을 남긴다.
[돌봄 상세 요청사항]
안녕하세요, 펫시터님 리지 돌봄 시 참고 부탁드립니다.
30분 동안 놀이 후 캔 사료 급여, 물 교체, 화장실 청소 부탁드립니다.
장난감은 안방 장롱 [고양이 용품] 칸에, 주식과 간식은 부엌 싱크대 아래 [고양이 용품] 칸에, 화장실과 삽, 화장실용 쓰레기통은 거실 화장실 욕조 안에, 물티슈는 식탁 위에 있습니다.
리지는 쓰다듬으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깨물기도 하니, 쓰다듬진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 놀이
낚싯대로 15분간 사냥놀이 부탁드립니다. 놀이 장소는 거실과 안방이며, 리지는 침대 위에서 놀거나 소파 위에서 지켜보다 아래로 내려와 잡는 걸 좋아합니다. 보상은 덴탈 스낵 5알을 주시면 됩니다.
- 주식 급여
습식 한 캔을 싱크대 위 숟가락으로 덜어 TV 앞 식기에 급여 부탁드립니다. 빈 캔은 물로 헹군 후, 주방 옆 다용도실 안에 있는 안쪽 분리수거함 캔 칸에 넣어주세요.
- 물 급여
물그릇 3개(안방 침대 앞, 거실 로봇청소기 옆과 소파 옆)를 부엌 정수기의 정수 모드 물 250ml로 교체해주시면 됩니다.
- 화장실 청소
리터락커 뚜껑을 열고 감자 및 맛동산을 넣으신 후, 뚜껑을 닫고 아래쪽 슬라이드를 당겨주세요. 내용물이 잘 내려간 후 슬라이드를 놓으시면 슬라이드가 다시 닫히면서 냄새가 올라오지 않게 비닐을 잡아줍니다.
드디어 돌봄 날, 오후 2시 5분에 펫시터님이 케어를 시작했다는 안내 톡이 왔다. 리지가 오전에 잘 있었단 건 성실한 자동급식기 사료 비움 알람으로 확인했기에(자다가도 급여 알람 소리가 들리면 뛰쳐 나오는 건사료 킬러 리지는, 여태 사료 알람을 단 한번도 놓친 적이 없다), 리지가 펫시터님과 좋은 케미를 발휘하길 간절히 바랐다.
30분 후, 돌봄이 끝났다는 톡이 왔다. 리지는 잘 놀았을까. 무서워서 소파 밑에 숨어 벌벌 떤 건 아닐까. 2시간이 지나지 않아 올라 온 돌봄사진과 일지를 먼저 확인했는데… 기특하게도 감자도 맛동산도 실하게(!) 만들어 놓고, 밥도 챱챱 잘 먹고, 펫시터님과도 잘 논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30분의 돌봄을 모두 담은 액션캠도 곧 올라왔다. 풉. 리지는 시작부터 귀여웠다. 현관문이 열리자 왼쪽 아래에 조막만한 고개를 빼꼼 내민 리지 얼굴이 영상에 그대로 찍혀 있었다. 거의 귀여움 급습 수준. 펫시터님이 내신 “꺅” 소리가 작게 녹음되어 있었다. 놀이는 또 어찌나 의젓하게 하는지. 내가 놀아줄 땐 사냥감을 덮치기 좋은 위치에 안 갖다주면 땡깡을 부리던 리지가, 펫시터님이 놀아주시자 사냥감이 어디에 있든 “고놈 참, 흥미롭군.”하는 표정으로 놀이에 집중하고 있었다(이 배신자…).
그래도 소파 밑에 숨어있을 줄만 알았던 리지가 처음 만난 펫시터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걸 보자, 리지가 너무 기특했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낸 첫날, 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참 밝네요.”란 이야기를 들은 엄마의 심정이 이런 걸까. 쫄보에 투덜이인 줄만 알았던 리지에게 낯선 사교성과 대담함이 느껴졌다. 몰라봐서 미안(근데 ‘선택적 의젓함’은 쫌 너무하다 너).
시간이 흘러 8월 휴가 전, 우린 짐을 챙기면서 리지 물품도 꼼꼼히 챙겼다. 남편은 캐리어 주위를 킁킁대며 돌아다니는 리지를 보며 이야기했다.
“리지가 1주일 뒤에 보자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
리지가 건강히 잘 기다려주길 바라면서, 우린 돌봄 요청사항을 아래처럼 더 신경써서 꼼꼼히 적었다. 캔, 간식, 장난감도 평소보다 두둑히 챙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