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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기 위해 '월급'을 포기하라

by 오늘

20대 중반, 첫 직장에서 나는 보통의 청춘들과 비슷하게 200만 원 언저리의 월급을 받으며 생활했다. 그러나 반복되고 과중된 업무와 비합리적인 조직 생활에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퇴사를 선택했다. 이후 패기 있게 시작한 사업은 제대로 망했고 다시 이전의 겪었던 회사 생활로 돌아갈 자신이 없던 나는 '프리랜서'라는 새로운 길을 택했다.


20대 중후 반인 나는 현재 교육 업계에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정규직 때보다 안정성은 낮아졌지만 급여는 지금껏 내가 벌어온 액수보다 훨씬 높아졌다. 아마도 다음 달에는 소득이 500만 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처음에는 250만 원의 소득이 생겼다. 늘 200 언저리만 찍히던 내 통장에 250이라는 숫자가 찍히게 된 것이다. 이후로 소득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마침내 통장에 400만 원이 찍혔던 때,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생각 아니, 착각했다. 1년 사이 나의 몸값이 두 배 이상 올랐다는 사실에 기뻤고 나는 현재의 생활에 머물기로 했다. 별다른 도전의식이 생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태한 생각의 근본을 뒤흔든 건 '레버리지(leverage) 기업 등이 차입금 등 타인의 자본을 지렛대처럼 이용하여 자기 자본의 이익률을 높임'라는 개념이 잡히게 되면서부터였다.


통장에 찍힌 400만 원이 훌쩍 넘는 숫자에 내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나를 용역으로 고용한 회사는 아무런 노동, 시간을 들이는 일 없이 가만히 1000만 원을 가져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당연히 프리랜서로 고용되었으니 고용주보다 덜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열심히 노동한 대가로 벌어들인 400만 원보다 가만히 있어도 벌리는 1000만 원의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내가 주 5일의 일정 시간을 노동 시간으로 비워두어야만 할 때 누군가는 시간의 자유를 얻으며 소득을 얻는다. 누군가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나를 레버리지해 시간적 자유를 얻고 있는 셈이다. 고용주와 용역의 관계, 회사와 노동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 당연하고도 자명한 레버리지에 우리는 쉽게 반기를 들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현 상황에 익숙해서, 속되게 말하면 그 이상을 꿈꾸는 일은 해본 적이 없어서. 특별한 이들만의 세상이라서. 그 특별한 이에 지독하게 평범한 내가 속할 거라는 자신이 없어서.



나는 내 가슴을 뛰게 했던 400만 원을 포기하기로 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나는 현재 나를 고용한 이에게 기존 업무량의 절반을 줄여줄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소득도 절반이 줄어들 것이다. 대신 나에게는 이전에 없던 시간이 생긴다. 그 시간 동안 투자, 부동산, 자기계발 등에 투자할 계획이다(자세한 사항은 앞으로의 글에서 보여줄 계획). 나는 월급을 포기하고 나 자신을 개발할 시간을 선택하기로 했다. 레버리지의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지금 당장 눈앞 생계에 절반으로 줄어든 소득이 마냥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당장의 지금이 아닌 10년, 20년 뒤를 생각하면 지금의 용기는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나는 지금 당장 눈앞의 일이 아닌 장기적인 수를 두기로 했다. 월급을 포기하고 확보한,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시간'으로 말이다. 겨우 시작이지만 평범함에 비범함으로 가는 첫걸음은 내디뎠다고 생각한다.



황인숙 시인의 시 <자명한 산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시인의 말처럼 이곳은 자명한 세계다. 고용주와 고용인, 늘 레버리지 당하며 살아가는데 익숙했던 내가 드디어 용기 내 그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걸으'려한다. 비로소 이제야 단단한 보도블록이 아닌 누군가의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것처럼 살아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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