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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 May 29. 2023

새롭지 않은 혁신은 혁신인가

공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고 듣는 단어 중 하나가 혁신이 아닐까요.


낡은 것을 바꾸어 아주 새롭게 한다는 뜻의 혁신은 더 이상 새롭지 않습니다.  회사별로, 업무별로 혁신 사례를 발굴하고, 발표해서 포상하는 연례행사도 루틴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저기서 혁신우수 사례집을 보내주면 책장을 들추는 수고는 하지만 그다지 시선을 빼앗기진 못합니다. 그냥 하는 일을 혁신이란 이름으로 포장했다는 것을 제가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은 아니겠지요. 그저 제가 변화에 둔감해졌기 때문이라고 해둡니다.




얼마 전 행정안전부에서 '일하는 방식 개선 우수사례 설명회'를 개최했습니다. 슬쩍 넘겨보고는 '음~~ 이런 거구나' 하고 지나치려다 한번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고서 편집 자동화'라는 문구에 낚인 거였죠.  


업무계획을 비롯해 각종 회의자료를 작성하다 보면 내용에 대한 검토보다 보고서 편집에 더 시간을 들이기도 합니다. 글꼴, 크기, 글자 간격과 자주 쓰는 문자표 등을 자동으로 정리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정말 좋겠지요. 내용에 더 충실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프로그램을 한 공무원이 만들었답니다. 홀로 코딩하며 장인정신으로 한 땀 한 땀 만든 것이지요. 각종 기능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여러 사람의 고민이 반영되었고 또 활용하면 보고서 작성 시간이 줄어들 것 같았습니다.  


이런 업무 개선을 보면 어떤가요?


정말 혁신적이다, 대단하다.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의  수고로움에 감사를 보낸 후

저는 아마존을 떠올렸습니다.  


무엇이든 다 파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아마존은 고객의 관점에서 늘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PPT로 발표하는 문화가 없다죠. 대신 A4보다 약간 작은 종이 6장에 축약해서 자료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글자 크기는 11포인트이고 부록이나 도표는 별도 첨부한다고 합니다. 참석자는 20분간 이 문서를 먼저 읽고 회의를 시작하게 됩니다. 기획단계부터 고객 관점에서 보도자료와 FAQ를 작성하는 업무방식은 차지하더라도 핵심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느낄 수 있답니다.  


물론 공문서는 일정한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인허가 사항에 대한 것에서는요. 이런 것은 법령에서 양식을 정하고 있죠. 참 다행입니다. 하지만 정책결정을 위한 보고나 토론 자료 등을 만들 때면 법령에 규정되지 않은 글꼴, 크기, 간격 등의 통제를 받게 되죠. 때로는 내용 검토를 시작하기도 전에 보고서 양식에 대한 지적으로 1차전이 끝나기도 합니다. 이럴 때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회의문화에 대한 로망이 생기죠. 그런 면에서 제게 아마존의 보고서 작성방식은 혁신입니다.




덧붙여 4급 이상 공무원들에게 보고서 작성문화 혁신 아이디어를  제출토록 하면 어떨까요. 천 명 중에 한 명, 아니 만 명 중에 한 명은 지금과 같은 보고서 형식을 타파하는 보고나 회의 방식에 대한 신박한 아이디어를 발굴하지 않을까요. 거창한 거 아니고 그저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용으로 토론하는 것만 해도 좋을 텐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의 기대와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보고 문화가 변할지도 모르니, 그런 시도는 상상만으로 종료합니다.  


끄악~~


Image by Michal Jarmoluk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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