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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두 시간을 오이도와 당고개를 오가는 지하철에서 보낸다. 가방에서 얇은 책을 꺼내 펼쳐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스마트폰을 켜서 어제 열린 국내 야구 결과나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이대호, 추신수, 김현수의 소식을 기사와 동영상을 통해 꼼꼼히 살핀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는 누군가의 문자를 보며 지난 인연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10분 안에 아빠를 혼절시키는 두 딸아이의 웃고 우는 사진을 보기도 한다.
그러고도 아직 지하철에 있다면 앞에 선 사람의 발과 그 움직임을 쫓다가 창으로 비치는 멍한 얼굴을 본다. 좀비다.
일상을 살아내다 잊고 있던 나의 얼굴을 만나게 되면 종종 좀비 같다. 물론 지금과 같이 미친 듯 사람을 물기 위해 달려드는 좀비가 아닌 1968년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나오는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니지만 천천히 사람들을 벼랑 끝 두려움으로 몰아가는 좀비를 억지스레 닮았다.
나는 좀비 영화를 찾아보지 않는다. 귀신이나 유령도 아니고 사람이 죽었는데 그 육신을 사용해 산 사람을 물어 자신과 같은 좀비로 만드는 설정이 불편하다. 이유와 목적도 없이 영혼 없는 몸이 되고 또 누군가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생각 만해도 거북하다. 어쩜 나도 좀비가 되면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 수 있고, 그 대상이 친구와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상상은 그동안 좀비 영화를 외면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얼마 전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좀비 영화를 봤다고 해서 놀랐다. 마니아들이 즐기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품었기에 그리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까. 천만 관객과 좀비 영화란 불편한 조합에 대한 궁금증은 귀차니즘에 빠진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나는 <부산행>이란 영화를 보았다.
#1
2016년 칸 영화제의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서 초연된 <부산행>은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져 좀비가 생기고 급속히 확산되는 상황에서 기차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무언가에 대한 인간의 치열함을 담아내고 있다.
물론 어느 지점에선 세월호의 사건을 떠올리기도 하고, 노숙자에 대한 불편한 시선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선입견을 보기도 하고, 생존을 위한 선택의 순간마다 인간의 민낯을 만나기도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 시스템의 부재와 결국 해결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몫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무겁게 다가올 즈음, 나와 가족이 당면한 그리고 감당하고 있는 육아 현실을 생각하며 그저 아빠와 딸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든다.
아빠인 석우(공유)는 펀드 매니저다. 바쁘다. 차근히 음식을 씹으며 점심식사를 할 수도 없어 보인다. 그런 그가 딸 수안(김수안)에게 생일 선물을 건넨다. 충분한 보상이 되리라 기대했던 그는 잠시 후 아이의 시선을 따르다 지난 어린이날 선물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용케도 기념일을 잊지 않았던 그는 추억의 내용을 잊은 무심한 아빠가 되고 만다.
그리고 무심함을 넘어 용감한(?) 아빠가 되는데.
석우 : 다른 거 원하는 것 있으면 말해봐?
수안 : 부산. 엄마한테 가고 싶어요.
석우 : 아까 이야기했잖아. 아빠 시간이 나면...
수안 : 아니요. 내일요. 맨날 다음이라고만 하고. 또 거짓말이잖아요. 아빠 시간 안 뺏을게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변명마저 너무도 흔한 “아빠 시간이 나면...”
얼마 전 나는 새로운 별명을 하나 얻었다. 첫째 딸아이가 붙여준 것인데, 다름 아닌 “이따 아빠”다. ‘이따’는 ‘이따가’의 줄인 말이다. 딸이 “아빠, 같이 놀자.” 하면, 나는 때로 노트북을 펼치고, 때로 야구 시청에 흥분하며, 때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어. 조금만 이따가. 아빠가 이것만 하고” 했단다. 그래서 가끔 나를 “이따 아빠”라 부른다. (자주 쓰고 싶겠지만 속 좁은 아빠가 신경질까지 낼 까 봐 가끔 그런다.) 요즘 딸아인 슬슬 눈치를 보고는 “아빠, 그거 하고 나랑 놀 수 있어요?” 하고 묻는다. ‘오~ 이제 많이 커서 아빠의 상황을 보고 배려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은 아빠의 이기심일 뿐이다.
석우의 딸 수안이는 혼자서 부산을 가겠다고 한다. 아빠 시간 안 뺏을 테니 그저 허락만 해달라고 말이다. 그래 정말 혼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도 그 먼 길을 혼자 가 본 적이 없어 보이는 녀석에게 두려움은 없었을까. 외침에 가까운 수안의 목소리에서 ‘혼자 가는 두려움’을 밀치고 터져 나오는 ‘함께 있고 싶은 간절함’이 보였다.
나는 매일 집을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얼마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함께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어슬렁거리는 좀비가 되어 말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영화의 중간, 좀비들이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로 무자비하게 때리고 던지던 상화(마동석)가 석우에게 말한다.
너 네 딸이랑 많이 못 놀아 주지. 바빠서. 네 딸이 좀 더 크면 네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사는지 알게 되지 않겠냐? 아빠들은 원래 욕먹고 인정 못 받고 그래도 뭐 희생하고 사는 거지 뭐. 안 그래?
이 대사가 귀에 닿은 순간 그의 우람한 체구에 붙은 커다랗고 굵은 손이 내게로 와 딱밤을 때린 것 같다.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마음이 복잡해진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아빠는 희생해야 하는 걸까? 누구를 위해서.
야근을 하고 늦어진 퇴근임에도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은 적이 종종 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아빠만이 공감하는 가족의 사랑, 부성애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우리가 왜 이렇게 야근을 하는 지로 시작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팔불출 자랑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집에는 남편과 아빠의 부재로 생긴 짜증을 서로에게 전가하다 결국 티격태격하고는 감정이 채 풀리기도 전에 지쳐 잠이 드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두고 난 여기 있어야만 했나?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욕먹고 인정 못 받는 삶에 집착해야 하나? 그렇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수년 전부터 TV에서는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아빠가 육아에 참여하며 가족과 함께 하는 소위 저녁이 있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아직 평범한 우리의 모습은 아니지만, 아빠 육아휴직자가 증가하는 현상을 보면 그 방향성만은 부인할 수 없겠다.
다만, 그러한 생활이 오늘이 아니라 내일로 미루어지는 현실이 때때로 사납게 추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