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초 소설 8
고등학교 시절,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외출신청서를 자주 내밀었다. 떡볶이 어묵 자장면 등 간식의 유혹 때문이었다. 지도선생은 이렇게 말하는 표정이었다. ‘야자 시간에 외출을? 너 해맑다, 이유를 묻고 싶지 않다, 뭐가 그리 재미있냐, 왜 그리 공부할 시간에 바쁘냐, 삐삐냐?’ 그 삐삐라는 말을 20년 만에 되새긴다. 총량의 법칙은 옳다. 그때 빼먹은 공부는 시효기간이 없어 10년이 지난 지금 보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때 선생님께 물었어야 한다. ‘왜 삐삐였냐고!’ 공부를 시작해 보니 문득 그때 담당 선생의 표정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왜 삐삐라고 했는지도 어렴풋이. 막힘없이 지나온 세월 같지만 내가 이렇게 해맑은 데는 이유가 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마법이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해맑은 웃음을 잃고 처절한 부대낌의 시절을 보내며 삶의 저 아래쪽을 철벅거리며 겨우 올라왔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처음 밝히는데) 솔직히 깜짝 놀랐다.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 대가 없는 성장은 없다는 것, 하물며 마법은 있다는 것.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태연하게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르는 삐삐 같은 ‘나’를 본다. 생각지도 못했던 남자를 만나고 조바심을 내게 하는 5년여의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출산하고 그 아들이 해준 것 없이 반듯하고 내 고등학교 시절을 뛰어넘을 만큼(민재는 초등학생) 잘 자라 어미의 잣대가 되어 주었다. 아니 본이 되고 있다. 삐삐의 마법이 이 이상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선물 같은 아들이 나의 8할을 키웠다. 민재는 나를 돌아보고 만나고 거울 보게 하였다. 나는 어른아이 삐삐에서 ‘마법을 지닌 어른’으로 성장했다. 민재가 엄마에게 일깨워준 것들이 있다.
‘모든 일은 때가 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세상은 공평하다, 용을 써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이 있다, 세상은 감사로 가득하다, 공부가 재산이다, 몸이 그릇이다,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만큼 담으며 살지만 넘치게 주워 담지는 않는다’.
또 하나의 내 필살기는 궁상과 분노가 없는 빌런이라는 것이다. 나 조민정은 어떤 사람과 조직에 속하여도 태연하게 내 할 바를 할 수 있다. 설왕설래와 이전투구의 소문으로 가득한 직장에 몸담고 있을 때 사방에서 소문의 진원지를 캐물을 때도 즐겁고 재미있게 생활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수영을 마치고 나서의 상큼하고 개운한 맛이 일상의 진드기를 말끔히 씻어준다. 건강한 몸 상태는 나의 일상을 깨워 어떤 일이 닥쳐도 투정하지 않는다. 사방에 슈퍼히어로가 떼로 몰려다닌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AI 형 히어로. 외모, 몸매, 힘, 정의감, 공격력, 염력, 비상한 머리, 스피드, 권력, 초능력의 집합체다. 그녀가 마지막 물 잡기를 끝내고 피니시에 터치하고 솟아오르면 슈퍼빌런이 된다. 그녀가 물 밖으로 나오면 슈퍼히어로들의 치석 같은 자의식이 스케일링될 것이다.
나는 슈퍼빌런, 삐삐 조민정!!
초록에 노랑, 장미는 멍울지고, 계절은 오월.
바야흐로 삐삐의 마법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