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초 소설 9
모가의 교정에는 결이 단단한 오래된 단풍나무와 애기사과나무 자두나무와 개망초 군락이 있다. 나무 아래 풀숲에는 열매 대신 다양한 공들이 떨어져 있다. 공이 열리는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손때 묻고 실밥이 터진 야구공과 탁구공, 연습용 플라스틱 공, 포켓볼 공…. 신나게 뛰고 달리는 빡빡머리 구릿빛 피부의 아이들, 눈빛은 맑고 투명하다. 도심의 불빛에 노출되어 코팅된 겁먹은 눈빛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시선들. 그 아이들의 거침없는 모습을 본다.
아이들을 만나며 40여 년을 달려와 도달한 종착역. 모가중에는 사람 꽃이 피고, 사제 간 교감의 열매가 익어간다. 모가의 가을 정원에는 어떤 열매가 열릴까. 교정을 거닐며 여기저기 떨어진 열매들을 보며 생각한다.
40여 년의 여정을 돌아보니 허허실실이었다. 태생적으로 남들 앞에 나를 내세우지 못했다. 막다른 골목에서는 한 호흡 쉬어 가는 것, 조금씩 손해 보는 것, 귀한 생명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 것, 한 번쯤 이웃과 동료의 마음을 느껴보는 것, 돌아보니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멈추고 보면 비로소 보인다. 사람은 누군가 조금씩은 아프고 견디며 산다는 것.
위를 도려내는 아픔을 참아내며 파도타기를 하듯 흔들려도 포기하지 않고 질주하여 이곳 모가에 당도했다.
모가는 나의 수고를 알아주고 안아주는 따듯한 둥지였다. 나를 품어준 모가의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여름은 평온하게 나를 감싸주었다. 내가 떠난 모가의 가을은 어떠할지 생각해 본다. 아름다운 추억과 여전히 뒹구는 그리움을 안고 모가에서 쉼표를 찍는다. 아직 내 인생에는 열어보지 않은 문이 있다. 이제 나는 인생의 두 번째 문을 열 것이다.
“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꼭 그렇게 기도하며 살았던 40여 년이 꿈만 같다. 혹여나로 인해 불편한 마음이 있다면 그 공을 멀리 힘껏 던져주시길 바란다.
나는 허허실실 박창경!
기도와 성찰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고 우정의 힘으로 버틸 수 있었던 세월 속에 남는 것은 감사뿐이다. 산책길에 얼핏 길가나 풀숲에 낯익은 공이 손때 묻은 채 떨어져 있거든 내가 모가 있었다고 기억해 주길 바란다.
내가 떠난 후의 교정에 여전히 고라니 멧돼지, 뱀, 청설모가 드나들거든 나 ‘허허실실 박창경’이 무쏘의 뿔처럼 건강하고 즐겁게 살고 있다고 여겨주기 바란다. 종착역에서 다시 출발하며 내가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조금씩 손해를 보며 완주해 보세요. 그곳에 당신이 열지 않은 문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 문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문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