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의 온도 25. 메주콩 밭에서

by 소요 김영돈

여름의 몸부림이 우리를 영글게 했다.


길을 잃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 가뭄에 대비해 파놓은 관정이 말했다. 그저 가만히 서 있어. 소나기가 내려도 뿌리를 내주지 말고 서 있기만 해 줘. 눕지 말고 버텨줘. 네가 타 죽을 만큼 가물면 내 전부를 쏟아내 너를 살려내고 죽을 거야.

조금 있으면 10월의 햇살이 너를 따스하게 비춰 줄 거야. 거스름이 모두 빠져나가 깨끗한, 묵직하고 포근한 빛이 온종일 너를 어루만져 줄 거야. 네 목을 조이는 열기와 습기는 이제 없어. 10월 내내 햇살이 너를 품었으니.


너는 메주가 될 거야. 들판 한가운데 이렇게 서 있다가 서리가 내리기 전에 이곳을 떠나겠지. 친구들은 알알이 다시 모여 서로를 부둥키고 성기며 뜨락에 매달려 햇살과 바람과 낙엽과 들판을 바라보며 가을을 만끽할 거야.


너는, 청국이 될 거야. 미로가 되어버린 내장을 다져줄 거야. 썩은 내가 나는 장 속의 오물을 수거해 그들과 함께 들판의 거름이 될 거야. 봄이 오면 알마다 새겨진 씨톨들 모아 다시 들판으로 걸어 나갈 거야. 거기 거름이 된 친구들과 지독한 냄새의 추억과 입맛을 되찾은 사람들과 몸져누운 환우들을 기억하며, 경주를 할 거야. 저 지평선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노란 씨톨들은 알고 있을 거야.

내장에 피가 돌고, 덧난 상처가 아물고, 살이 찌고, 입맛이 돋는 게 어떤 건지.

가을 햇살의 마음에 어떤 무늬가 새겨져 있는지. 견뎌 낸다는 게 어떤 건지. 살아있다는 게 어떤 건지.


10월의 마지막 날, 오늘의 너를 기억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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