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여름이 지났다. 봄과 여름을 보내는 동안 무릎이 두 번 벗겨지고 면도날이 겨우 아킬레스를 빗겨 나갔다.
갑자년 1월, 폭설이 내리던 날 용 씨는 아껴두었던 8천 원으로 6천 원어치 농약을 사고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었다. 생면부지의 노숙인 친구가 물었다. "오늘 잘 데는 있수?" 용 씨는 주머니의 약을 만지며 딱히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이곳 거주시설(안나)에 왔고 동료 천에게 주머니의 약을 빼앗겼다. "형님, 그것도 부질없어요. 일단 살아는 봅시다."
그동안 구 씨는 한쪽 눈을 잃었고 수 씨는 감사와 긍정이 증폭되었다. 사람들은 수 씨를 철부지 라고 하였지만 진 씨는 수 씨의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진 씨는 전교 1등을 했던 수재였지만 진 씨의 재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재능에는 성적 외에 여러 다른 요인이 포함된다는 말이 증명된 셈이다. 이를테면, 긍정성 유연성 인내 호기심 위험감수 같은 것들은 마음의 골절상이 회복되었을 때 꺼낼 수 있을 거란 거.
진 씨에게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질문하지 못했다. 어떻게 더 나빠지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고, 진 씨는 '수 씨 같은 사람이 있어서'라고 말했다.
선량한 배우 선균 씨가 죽었고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사상 최고의 무더위도 생명을 모두 쓰러뜨리지 못했다. '여름 산' 중턱에서 어둠과 무더위, 야생동물과 싸우던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운문산을 바라보았다.
동해의 바람을 지키는 문지기, 운문산. 외진 골짜기에는 복숭아 사과 감 대추 자두가 풍성하지만 그중의 으뜸은 감과 대추이다. 사람에 허리를 베여 두 겹 세 겹의 상처를 받을 때마다 온 힘을 짜내 한알이라도 더 열어 두었지만, 새끼들에게는 희망의 씨가 없다. 상처를 동여맨 채 버텨내는 도리밖에는... 구름에 숨었던 달이 얼굴을 비춘다. 한밤중 달빛을 받아 춤을 추었다. 어둠 속에서 잠든 사슴벌레가 씨 하나를 물어온다. 모두가 잃어버린 씨 하나를.
지난겨울, (2023.12.15~16) 청도가 떠오른다. '감이랑 대추가 열리면 청도에 다시 와야지' 겨울비 내리는 청도, 운문사와 은주 씨를 뒤로하고 그 약속을 했었다. 다시 청도에 당도하니 반기듯 가을비가 쏟아져 내린다. 나는 운문산을 넘어 다가오는 지난겨울의 추억을 빗속에 흘려보내며 '처진 소나무'에게 말했다. '당신의 겨울은 어땠는지, 여름은 그리고 봄은. 500년의 세월은 어떤 것들을 품고 버릴 수 있는지. 생은 어떤 건지. 하물며 희망이 무엇인지'
어깨높이의 대추나무와 감나무 과수원을 거느린 은주 씨는 여전히 안녕하다. 순 씨는 목에 걸린 슬픔을 피처럼 토해냈다. 아침에는 햇살이 뜨락에 스며들었고 희 씨는 강의가 있어 일찍 청도를 떠났다. 구름 속을 들락거리던 달 아래에서 우리는 말없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청명한 햇살이 거실에 스밀즈음 쏟아낸 눈물과 감당해야 할 미래와 가을을 품고 호수로 향했다. 산 개울 능선 구름을 막아선 운문산 이편의 나무들은 진중하다. 대추나무 감나무의 침묵과 투명하고 붉은 열매들. 나는 지난겨울 용 씨가 농약을 사고 남은 2천 원을 어디에 썼는지 내내 궁금했다.
청도에 가을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