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의 온도 15. 미운 정

by 소요 김영돈

[미운 정, 고운 정, 다정]


올빼미와 아버지를 위한 송가. 달궈진 숯처럼 붉고 뜨거운 '슬픔과 분노, 고뇌'를 다스리는

'가슴, 감정, 마음, 애정, 우애, 인정, 정서 '이런 물방울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미운 정'이 쌓이면 무엇이 될까?

분노 증오 환멸 복수심 같은 걸 추슬러 긴 호흡을 쉬게 하고 삶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게 할까.

모난마음 천 번을 다듬으면 육신의 경계너머 투명한 영혼을 만날 수 있을까? 천년 동안 마음산을 오르면 분노가 환멸이 미운 정이 되고, 미운 정은 산맥이 되고 물줄기가 되고 하늘을 수놓는 숲의 연대를 이룰까? 오월 귀갓길에 미운 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노랑빛이 묻어나는 나무의 눈부신 자태와 장미의 향연. 세상이 저토록 아름다운 데 정이 미워지는건 어떤 것일까. 어혈이 된 '미운 정'의 토사물들이 흙속에 스며 거름이 되나. 저 아름다운 자연을 키우나. 그래서 저토록 자연은 초연하고 담대한가.


저 자연은 인간의 미운 정을 거름 삼나. 정은 저 호숫가 나무의 거름이 되고 물을 정화하고 앵두의 붉은빛에 색을 입히나. 저 화가는 누구인가? 오월의 수목을 그리는 저 화가는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미운 정을 듬뿍 묻혀 호수를 바라 화폭을 세우고 있는가? 미운 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햇살에 취해 날다 고압 전봇대에 충돌했다. 순간 올빼미는 고압선을 연결한 애자를 쥐로 착각했다. 깊은 허기, 영혼의 허기가 올빼미를 가속하게 했다. 무서운 속도였다.

애자, 고압선을 거쳐 전봇대 쪽으로 뛰어올라 풀썩 떨어졌다. 그 경로 여기저기 올빼미의 어혈이 낭자했다.

날개가 꺾인 올빼미에게 개미가 꼬인다. 개미의 연대가 몰려든다. 푸드덕거려도 소용없다. 개미부대는 이미 살을 물고 몇 개 소대는 부러진 날개의 연결점, 옹달샘처럼 피가 고인 곳에 진을 쳤다.


개미 소대장은 명했다.

"당분간 여기가 베이스캠프다. 1억 년을 생존한 조상의 가르침이다. 조금씩 먹고 많이 움직여라"

올빼미는 이런 말을 했었다.

'그 인간에게는 어떤 사과도 받지 않겠다. 물론 어떤 용서도 할 수 없다'. '저런 인간 우리 조직에 없어도 상관없으니 교체하라'. '늙은 사람은 바꿔라, 쉬는 시간이 많고 죽는소리를 한다, 아참, 그들은 휴게실에 못 가게 방학 중에도 휴게실 문을 잠가라', '돈 되는 모든 사업을 모두 신청하자, 순서는 많이 주는 쪽으로 내용은 상관없다', '밝게 웃자 웃어, 내가 귀한 떡을 준비했으니 만나게 먹고 다들 웃자,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올빼미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 홀연히 둥지를 떠났다. 문득 오월의 초록을 희미하게나마 본 것이 아닐까?


"나 병원에 다녀오는 동안 다들 웃고 있으세요, 병원 세 군데 돌아야 하니까"


귀갓길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 '미운 정'이 솟아 올라왔다. 세상에 '없어도 되는 인간'은 어떤 사람일까,를 궁리하며 '미운 정'이 떠올랐다. 이래서 미운 정이구나. 올빼미가 그토록 잡고 싶은 삶은 무엇일까? 전봇대 주변에는 까마귀 까치떼가 싸움을 멈추고 푸드덕 거리는 올빼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참새떼도 때까치도 딱따구리도 잠시 숙연해졌다. 아주 잠시, 그러니까 개미병정의 작전개시와 올빼미의 현격하게 느려진 푸드덕 거림은 동시에 맞물렸다.

미운 정...... 우린 조금 다를 뿐인데, 왜 이토록 아픈 지점이 다른가?


장담컨대 아버지도 미운 정에 한몫했었다. 아버지가 시조실력 하나로 장끼 까투리를 쫓아내던 시절이 있었다.

시조가 좋으면 홀연히 집을 떠나 산천을 떠돌며 마음껏 노래하고, 괜찮은 스승을 만나 명창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외골수, 유아독존, 나르시시즘, 낯가림, 궁상, 실명, 가난, 잘못된 거래, 조상파묘, 울분을 동반한 카리스마, 시대에 불화, 제도권에 대한 복수심'

이 정도면 장렬한 객사도 고려해 볼만했을 것을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조강지처 근처에서 맴돌다 떠났다. 미운 정이 쌓이면 고운 정이 되나, 고운 정에는 미운 정이 동반하나, 아니면 모두가 결핍을 채우기 위한 처절한 날갯짓이었나.


정의 물방울들이 오늘은, 비가 되어 저 송홧가루를 모아 흘렀으면 좋겠다. 능선을 씻어 내리면 좋겠다. 웅덩이의 개구리 맹꽁이들이 파티라도 열도록, 오래간만에 시조를 멈추고 회포를 풀도록, 올빼미가 눈을 감도록 아버지가 쉬어 가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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