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의 온도 10. 초록비의 운명

by 소요 김영돈

저 연둣빛 순은 빗방울이 따갑지 않을까. 연두부 같은 살결인데 구멍 나지 않을까. 빗방울에 구멍이 나면 애벌레 먹이보다 더 나을까. 구멍 나면 바닥에 떨어지거나 애벌레 뱃가죽을 푸르뎅뎅하게 물들이겠지. 일부는 나뒹굴겠지. 가라앉지 않는 내 상념의 대가리를 빗줄기에 던져두고 급행열차 등받이에 몸을 툭 던지면 땅속 깊이 뿌리박은 나무들의 숨소리가 바닥을 뚫고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비가 초록인가. 연둣빛 잎의 뿌리가 빗줄기를 삼켰나. 나이가 들어도 아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어른아이'의 지배를 받으며 30여 년을 버텨낸다는 건 어떤 것일까. 예정에 없던 초록비가 차창으로 개울로 강으로 들판으로 쏟아져 내리면 나는 한풀 더 꺼져 쇠바퀴에 몸을 맡길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일생 뒤척이던 빗살무늬 인생, 밑으로 물기가 뚝 뚝 떨어진다. 수많은 우연들이 사방에서 모여 무쇠로 된 열차의 이마를 퉁퉁 투두둑 내리 치며 운명의 잠을 깨운다. 잠들지 않는 운명, 눈도 꿈쩍하지 않는 무쇠열차는 세월의 바퀴를 견고하게 굴린다. 운명은 발광을 한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린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205여 년 전, 신의 운명을 건들다 죽은 괴테라는 인간은 말했다.


"네 노력에 끈기 더하라"


이에, 2019년에 죽은 크럼볼츠라는 사람도 '흥미, 유연성, 긍정성, 위험감수에 인내'를 더하라고 거들었다. 2024.4.24일 초록비의 우연 앞에 나는 이렇게 뇌까린다.

'과연 그럴까?'

초록비가 심장을 관통하고 나면 거기 야생의 사계가 소설처럼 펼쳐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감지하며 나는 위험을 감수할 결심을 한다.


덜컥 열차가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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