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의 온도 4. 높은 산 깊은 골

by 소요 김영돈

서울의 봄, 자막 뒤로 이 노래가 흘러나올 때는 가슴이 만신창이 되어버렸다. 출구를 찾지 못한 나는 전두광이 지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오줌을 지리고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강원도 철원에서 철모를 쓰고 적막한 산하, 눈이 내린 전선을 갈 때는 가슴이 벅찼다. 매우 높은 산과 깊고 깊은 골짜기가 많은 이 땅의 휴전선 근처에서 별은 밤에나 볼 수 있었고 낮에는 부사관과 밥풀떼기 그리고 어쩌다 말똥 두 개 앞에서 목이 터져라 거수경례하며 보냈다.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를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니코틴에 찌든 푸르뎅뎅한 입술에서 ‘박통이 죽었단다, 말조심하고 돌아다녀라’하는 말에 잠을 깼다. 충혈된 흰자위 사이로 뭉쳐있던 아버지의 눈곱과 수심이 가득한 미간과 ‘국회의원 박찬’이라고 박힌 12달이 한눈에 보이던 달력…. 달력에 새까맣게 붙어있던 파리들은 날이 밝을수록 기승을 부렸다.


그렇게 사춘기 시절 한가운데를 정장한 군인들이 지배하며 지나갔다. 아버지가 떠나고 대학을 입학하고 군에 입대하는 동안 매캐한 최루탄 냄새는 가시지 않았고 군에서는 최루탄 냄새가 나는 일명 ‘관심사병’의 꼬리표는 군 생활까지 장악했었다. 돌아서 생각해 보니 그 당시 부사관이나 장교들 나이가 20대이었다.


정훈교육 때마다 ‘그냥 쉽게 1번 후보로 가자, 조선은 이 박사 아니었으면 다 굶어 죽었다’ 식의 투표 시 주의사항을 들었고 그 여세는 군을 제대하고 나서 복학을 한 후에도 꽤 오랜 세월 이어졌다.


결혼, 부정 축재, 하나회 해산, IMF, 대통령의 자살, 다시 대통령의 투옥, 다시 대통령의 사면 다시…. 대통령의 어퍼컷, 다시 대통령의….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 전우여 들리는가?’ 귓전에 맴도는 군가를 떨쳐버리려 진저리를 쳤다. 시원한 배출감으로 알 만큼 알만한 나이대들이 화장실에 줄을 서 있다. 머리에는 휴전선에서 사시사철 녹지 않고 버티던 흰 눈 같은 새치가 희끗희끗한 나이 또래들이 온다. 노상 퇴짜 맞으면서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미팅, ‘J에게’ 노래에 취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중년들이 영화관을 빠져나가 신도시 술집으로 흘러 들어간다. 낯익은 뒤통수와 어깨들, 하나같이 굽고 기운 뒷모습 들이다.


‘노량해전’이 개봉되었고 나는 팔순의 노모와 영화관에 갔다.

노량해전, 한가운데 순신은 북채를 내려놓고 쓰러져 있다.


“북을 쳐라, 내 죽음을 내지 마라”


팔순 노모는 이 장면에서 “사위, 그만 집에 가자, 배고프다”하고 보챈다. “어머니 이순신이 아직”

“그럼 나 소변 마려우니 화장실 갈 테야”

나는 팔순의 노모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전쟁의 아우성을 잠재우며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북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밤거리 저편에 욕망을 욕망하는 자들이 광화문 네거리를 포위하고 있다.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도시 한가운데에는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청년 술집이 가득하다.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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