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혜용 씨의 낮달

60초 소설 21.

by 소요 김영돈


찔레덤불 앞에서 볕을 쪼이던 뱀을 보고 혜용 씨는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그녀 인생의 가장 빠른 걸음이었다.


하늘을 나는 펭귄무리, 뭉개 뭉개 파도치는 구름 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공주, 긴 모래벌판이 그려진 화려한 양산이 산책길을 되돌아 달아난다.


그녀가 골랐을, 그녀가 탄성을 질렀을 명화란 사실은 양산 끈까지 배치된 그림으로 알 수 있다. 혜용 씨는 모네를 생각하며 손잡이를 꼭 쥐고 뛴다. 조막만 한 손, 발도 얼굴도 가슴도 어깨도 오밀조밀한 혜용 씨는 손에 온 힘을 집중했다. 힘을 다해도 손잡이를 제외한 많은 것들이 빠져나갔다.

자존심, 승부욕, 자신감, 가오...


헉헉 숨을 내뱉는 동안 췌장이 아리다.

"에휴 징그러워 끔찍해 끔찍해 모두 가버려. 내가 가는 길 어디든 나타나지 마."

놀란 뱀이 물었다. "저 아이 앤은 아니지? 앤은 머리가 빨강인데 흰색이잖아. 나를 보고 달아날 리가 없는데 도망치는 것도. 뒷모습, 그녀를 증명하는 양산화, 흔들리는 보폭 모두 낯익은 모습인데 인사도 없이... 저 애는 누구? 찔레순을 빨아먹다가 볕을 따라 나왔는데 아~4월의 볕을 따라왔는데..."

나는 뱀에게 전했다.

"네가 징그럽고 끔찍하대"


뱀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이 말을 남기고 찔레덤불로 돌아갔다.

"그녀에게 전해줘. 참오동나무아래 수레국화 쪽에는 내 친구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다고 보고 싶다고"


참오동 꽃잎 수북한 길섶, 수레국화 핀 오솔길 앞에 혜용 씨가 숨을 몰아쉬고 있다. 뛰는 가슴을 달래는 그녀 눈앞에 노란 고양이 한 마리가 걸어간다.


"어유 너무 예쁘다. 나 수레국 너무 좋아해. 벽오동은 어디 있나 거문고는 벽오동인데. 오오 나비 너무 귀엽다. 너 어디 가니? 너무 평화롭고 예쁘다"

혜용 씨는 너무 가슴이 뛰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양이는 자신을 혜용 씨에게 맡기고 대자로 누워 크게 하품을 하고 가물가물 낮달을 보며 존다.


혜용 씨는 알고 있을까. 방금 야옹이는 두 마리의 뱀을 잡아먹고 식곤증이 왔다는 사실을, 참오동나무 아래 떨어진 수북한 꽃잎과 수레국화옆 찔레 덤불숲 핏자국의 리얼리티를, 그 위로 낮달에 비치고 있다는 현타를.


혜용 씨가 달아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이 아닐까. 혜용 씨는 61년의 세월이 두렵지 않다. 단지 조금 징그러울 뿐이다. 고양이가 자신의 입으로 혜용 씨의 손을 핥고 머리를 조막만 한 손에 맡긴다. 양산을 끝까지 쥐고 있던 손에.

푸른 계절이 깊어간다. 저물녘에

낮달이 조금씩 차오른다. 혜용 씨의 췌장이 쉴 시간이다.


<2025.5.7. 모가 산책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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