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초 소설 29
여우비가 온다.
찢어진 청바지 빨간 장화 신고, 어슷 비치는 햇살 사이로 여우비 온다. 산그늘 장둥밭에 홀로 완두콩을 따던 님 앞에 나타나 오금을 저리게 했던 희미한 여우그림자, 영혼을 오싹하게 노려보던 눈빛. '화려한 날을 경계해, 생은 그런 게 아니야'라고 말하며 조용히 걸어오는 여우비.
여름의 문 앞에서 사라지는 들꽃 앞에 놓인 화려한 날들을 모두 가려주려는가.
한철을 살다 떠나는 들꽃을 애도하려는가. 소리 없이, 가늘게, 햇살사이로 쏟아진다. 들꽃이 목마르지 않도록 촉촉이.
네가 오면, 제초제에 쓰러졌던 엉겅퀴랑 개망초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계단에 선잠 들었던 왕바랭이도 몸을 풀 것이다. 아무리 뽑고 베고 짓눌러본들 잡초가, 들풀이, 들꽃이 죽는가. 여우비는 6월의 어깨를 툭툭 치며 저수지를 휘돌아
여우비는,
맨드라미, 도라지꽃, 붓꽃, 수련, 연과 인사하고 개구리 연못에서 한참을 수다를 떨고 있다.
6월이면 시들고 씨는 여물어 떨어지는 봄 들꽃의 한 철 나들이. 이제 여름 가을 겨울을 땅속에서 공중에서 개울을 배회하며 보내야 한다. 보고 듣고 묻고 소요하다가 서리가 내려 오금이 저리면, 죽은 듯 잠들 것이다.
여름의 열기, 가을의 풍요, 겨울의 적막. 특별한 것들은 모두 속으로 삭여야 한다.
생은 한철인걸. 들꽃처럼 왔다가 여우비를 만나고 사랑을 하고, 못다 한 말들은 묻어두고 화려한 날들은 온몸을 흩뿌리다, 이내 들꽃처럼 보고 듣고 느끼다 떠나는 게 생인걸.
생에 마지막 근무지 1년의 첫날 여우비가 내린다.
[2025.07.01, 모가 개망초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