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초 소설 36
저 수초, 엷은 수련잎이 내 몸에서 얼굴에서 탈피했는가. 창백하도록 청푸른 비색의 하늘아래 잇몸을 드러낸 태양이 8월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재능 있는 자는 감당할 일이 그만한 법, 너대로 살라"하고 홀연히 떠난 아버지가 그립다. 탈피한 맨살에 새살이 돋으려나 등짝이 가렵고 핏기 없는 얼굴에는 다시 검버섯기운이 인다. 저수지에 깊숙이 박힌 저 비색 하늘을 따라가면 거기 탁 트인 고려의 가마가 보이려나, 붉게 타오르는 불가마 앞에서 눈을 부라린, 고려의 고집쟁이 옹기장이를 만나려나. 오늘따라 비색이 나를 죽음 쪽으로 몬다.
흙에 땀에 시절에 단체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영혼의 무리에 사유하는 독지가의 사유를 덧칠하여 유약을 씌워야 하거늘... 내 재능에 끈기를 더 해 세상의 모든 언어로 통해야 하거늘.
천 년 전 고려의 상감, 선각, 바가지로 영혼을 흔드는 비색을 이 땅에 세우고 싶었건만. 세월은 어디로 빠져나갔는가? 청춘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명불허전, 청자의 비색 앞에 탄성을 자아내던 스승은 죽고 나의 재능을 탐내던 북한의 지도자도 죽고 포장하다만 도자전시장 장석이 떨어져 나갔다. J의 재능은 퇴각하는 여름에 쫓기어 저수지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데. 설익은 밤송이 하나가 바람에 떨어져 저수지로 굴러간다. 아니 그쪽이 아니야, 하고 말하는 사이 백로 한 마리가 독 오른 뱀을 물고 저수지를 맴돈다. J는 눈을 비빈다. 저 백로가 빨간 모자를 썼나? 천년의 학이 세월을 넘어 날아왔나. 학은, 뜨거운 햇살 진파랑 하늘을 담은 저수지를 노려보며 날고 있다.
J는 말한다.
"그날(1963년), 평양행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외면했어야 해"
아버지가 답한다.
"아니, 그게 너다운 거다. 그것이 네 재능이고"
남미여, 스페인이여, 파리여, 내 안을 가득 메운 언어여!
열망이여 그리움이여!
저 하늘 길의 비색을 이 땅에 소환해 다오. 이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20250819. 프랑스 보자로 건축학교 1등으로 입학한 천재건축가, 동백림사건으로 재능을 다 살리지 못하고 한 시대를 방랑한 9 순의 J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