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의 온도 19. 벼꽃

by 소요 김영돈


벼꽃이 핀다. 아~이맘때 벼꽃이 피는구나. 주름진 농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는 이때. 감자가 여물고 송이밤이 귀여운 크기로 아기 머리처럼 흔들리는 때. 가뭄이 몇 날 며칠 계속되던 날 양동이에 끈을 매어 밤새 물을 퍼 올리다 잠든 아버지 어머니를 보았다. 새벽녘 물을 퍼 올리다 개울가에 쓰러져 잠든 그들의 눈에 끼어 있던 눈곱 같은 벼꽃. 저 꽃을 보고 싶어 밤을 지새우며 물을 퍼 올렸을 것이다.


벼꽃이 피면 다리가 부러진 참새도 벌떡 일어선다. 다 태워버릴 듯 작열하는 태양을 두 눈 부릅뜨고 맞이하는 벼꽃이 있어 마른 논에 쩍쩍 갈라지는 논바닥에도 벼는 깊이 뿌리박고 있다. 햇살 알갱이를 품어 사람의 허기를 달래는 하얀 밥 한 그릇을 선사하는 꽃. 그래서 그런지 불현듯 태풍이 몰아치거나 떠났던 장맛비가 다시 돌아와 칼질해도 벼는 태연하게 누웠다 일어선다. 넓은 들판에 농부가 허락하기 전에는 절대 죽지 않는 꽃이 핀다. 저 초록의 서슬 주변에 환삼덩굴과 칡넝쿨이 어슬렁거린다. 그 지독한 넝쿨들도 논으로 손을 내밀지 못한다. 벼꽃은 꽃을 시기하지 않는다. 하물며 남의 생육과 번성에 관심 두지 않는다. 하얀 고봉밥 한 그릇을 무엇에 비할 것인가? 농부의 피와 땀과 눈물과 막걸리를 마시다가 때로는, 막걸리를 닮은 농약을 한 사발 마셔도 독기를 내색하지 않는 꽃. 그 꽃에 취해 논에서 벼가 마실 농약을 벌컥벌컥 마셔버린 농부의 혼령을 어디서 달랠까.


벼꽃이 필 때 개암이 익어가는구나. 벌개미취, 금불초, 모새나무, 미국부용, 아스파라거스…. 나리꽃이 지천으로 피는구나. 나리꽃이 피면 다래 넝쿨 사이에 몽실몽실 다래 머루 포도가 검푸르게 익어가는구나. 벼꽃이 핀 논을 지나며 진초록의 생명을 느낀다.


여름의 끝 언저리 논두렁길을 걸으면, 논이 끝나는 동네 모퉁이를 돌아가면, 거기 벼꽃 마중 나오는 당신이 걸어올 것이다. 하얀 모시수건을 두르고 청포를 입고, 하얀 쌀밥 한 그릇에 일생을 바친 당신이 걸어올 것이다. 나는 서둘러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가 비워두었던 당신의 성곽에 불을 켜두고 서늘해진 여름 저녁을 기다려 봐야겠다.


벼꽃이 필 때, 저녁노을은 절정에 달하곤 했으니.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한 번쯤은 서녘 하늘을 바라볼 것이다. 나는 청자 주전자에 진달래 술을 준비해 두고, 홍어에 묵은지를 듬뿍 썰어놓고 흑산으로 떠났던 친구에게도 기별해 두어야겠다.


친구,

벼꽃이 피고 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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