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초 소설 45
한스가 전영애 촌장을 만났다면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당해보지 않고 절대 알 수 없는 절망의 순간에, 단 한 사람의 깊은 위로가 있다면. 위로할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괜찮은 증거를 보여주세요. 다 털어내도 벌집이 되곤 하는 '굴욕, 환멸, 분노, 수치, 죄책감, 모멸감'을 견뎌낼'
'한스,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이 네 앞날에 있단다. 마치 예정된 죽음처럼 분명하게. 내 사는 집을 팔아 이곳 여주에 '괴테마을'의 씨앗인 작은 집하나를 마련했을 때, 집이 이곳 하나뿐이어서 서울로 출퇴근을 하며 기다린 것도 나 한 명쯤, 증거를 보여주고 싶었단다. 아직 열지 않은 문이 있다는 것. 씨앗이 어떤 나무가 될지 모른다는 것, 견뎌내면 뿌리가 깊어져 둥치가 커진다는 것'
'네 고뇌의 시간을 나는 알 수 없다. 그건 본인이 아니고는 절대 알 수 없는 순간이거든. 하지만 한스, 나를 보고 한번 더 생각해 주면 어떻겠니?'
촌장은 그렇게 말하고 가을이 깊어가는 여백의 시정 뒤편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낙엽 밟는 소리가 새들의 발소리와 섞인다. 달빛 받은 촌장의 뒷머리가 희끗희끗 멀어져 간다. 작고 갸름한 어깨 위로 단풍잎 하나가 촌장의 어깨 위로 툭 떨어진다. 교정 수채구멍에서 옮겨 심은 **고아나무의 이파리다. 7인분의 노예, 나무고아원, 깊은 경청, 그리고 열려있는 질문.
한스, 마음이 어떠니? 견디는 마음은 어떤 거니? 네 앞에 열지 않은 문이 여기 어디쯤 보일 거야. 나는 늙고 시력이 둔해 잘 안 보이지만 아직 40년 이상의 시간이 있는 너는 보일 거야. 내 눈에는 네가 문을 열고 또 열고 다시 열며 살아가는 모습이 꿈인 듯 생시인 듯 보인다. 한스? 어쩌면 네 앞날의 문 앞에 햇세라는 문이 있었다는 생각이 가뭇 가뭇 느껴진단다.
우선,
오늘을, 견뎌보겠니?
내 앞날에는 '괴테전집 완역'이란 철문이 놓여있단다. 남은 시간도 체력도 시력도 부족하지만 말했잖니. 아직 열지 않은 문이 앞날에 있다는 거.
<2025.10.19, 여주 강천 전영애촌장>
*한스 기벤라트 ; 햇세의 소설 수레바퀴아래서의 주인공)
** 노숙나무 ; 전영애 촌장은 여백서원 뜨락에 고아나무를 옮겨 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