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초소설 47
9 순의 조상권 선생이 물었다.
'술 좋아해요? 현, 그럼 이분에게 사과와인 한 병 드려요'
조 선생은 화선지 앞에 붓을 들었을 때, 현은 흙집(도자로 구울) 앞에서 조각칼을 들었을 때, 시간이 멈춘다.
'비색과 집짓기' 모두 두 사람이 흙으로 범벅이 된 세월을 낚는 방법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각자의 우주 앞에 앉아있었다. 우주의 문을 열어 한걸음 내딛으면 새벽안개 걷히듯 펼쳐지는 비색의 오묘함으로 조 선생은 심취한다. 구도 흙과 불의 열기, 땀, 기다림, 정신과 육체의 노고, 재능으로 드러나게 될 청자와 비색. 켄트지 앞에서 삭정이 같은 손이 움직일 때마다 혼을 향해 다가오는 은은한 비색을 좇다 보면 세월은 한나절이 무색하다. 순간이다. 아까운 세월이 90년이 흘렀다. 30년은 불꽃, 60년은 방랑, 방랑의 30년 중 10여 년은 현과 함께였다.
집안의 부유, 동경유학, 프랑스유학, 김일성, 이북에서 청자복원노력, 북파공작원, 동백림사건, 남미 페루... 스페인 프랑스 파리...... 조선, 자유, 민주주의, 광주도요. 한 세월이 꿈처럼 지나갔다.
'침은 언제 맞을까?'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그걸 맞고 나면 온몸이 시냇물처럼 흘러 나른하고 잠도 잘 오고 몇 날 며칠은 가뿐하고'
'시간이 허락되시면 맞추어 보겠습니다.'
'현, 이분 사과와인 한 병 주시게 친구 삼게. 늙은 친구는 싫어 만날 아프다고 죽는소릴 해대서 늙은이들은 안 만나 허허'
'내 지인들은 내가 담근 사과와인이 제일 맛있다고들 한다네' 선생은 침 맞는 날 와인 한잔 하자며 환하게 웃었다.
그날 나는,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둘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왠지 당신 마음이 흩어질 것 같았다.
달포 전의 일이었다. 얼마 전 쌍십절에 불현듯 마음이 올라 시간 좀 되시느냐 물었더니, 일정이 안된다고 아쉽지만 다시 잡자셨다.
오늘(10.23)
비색을 가슴에 품고 우주의 켄트지를 날던 조상권선생이 떠났다. 범부들에게 늘 영원한 이방인이었던 천재. 늙고 고단한 구순의 육신을 헌 옷처럼 벗고 홀가분 날아가셨다. 좌우 이념으로 혹사한 세월 동안, 선생은 타격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청자의 비색 안에 가족도 미련도 꿈도 사랑도 담아두었을 터다. 조상권 님이 도자위에 학을 그린다. 굵은 압펜으로 정교하게 일필휘지로 그린다. 손에 힘이 빠져나가지만 옆에 있는 현을 위해 한 마리 더 그린다. 손끝에 압정을 찔러 피를 낸다. 학의 머리에 붉은 피를 찍어 바르고 그 위에 물감을 덧씌운다. 붉은색이 빛난다. 두 번째 학의 머리를 색칠하다 붓을 떨어뜨리자 푸드덕, 학이 날아오른다. 날아오르며 도자에 머문 현을 돌아본다.
'내 수제자, 도반, 사랑'
현의 부신 미소가 조상권의 날갯짓에 힘을 보탠다.
가을하늘, 들판 위로 날아오르니 아직 푸른 적단풍이 흔들린다. 조 선생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는다. 이제는 좀 날 것 같다. 날 것 같다. 아니, 좀 살 것 같다.
언제든, 여건 되심 기별하세요.
'사과와인 한잔' 약속 지키시고요.
가끔 소식 주시고요.
[2025.10.23. 무등 타고나서 조상권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