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깊고 푸른 안성기 씨의 미소

60초 소설 57

by 소요 김영돈


눈보라가 꽃잎처럼 흩날렸다. 정자동 촛대다리 위에서 바라본 탄천 변 빈 나무의자에 놓여 있던 추억이 눈꽃과 함께 쓸려 갔다. 눈꽃은 도심의 불빛에 눈부시다. 어두워지는 저물녘, 다리에 서서 넋을 놓고 서 있자니 눈에 눈이 박혀 눈물이 난다. 송곳 같은 추억에 찔려 옴짝달싹 못한다. 영화 속에서 일생을 살던 안성기 씨처럼, 시간은 영사기처럼 지나갔다.

안성기의 ‘하회탈 미소’를 보면 한겨울에도 봄기운이 느껴진다.

‘실미도, 삼포 가는 길, 깊고 푸른 밤’의 안성기 씨가 떠났다.

장미희 씨는 조문을 다녀갔을까? 그녀는 짝을 만났을까.

내 기억 속, 깊고 푸른 밤에 잠들어 있는—장미희 씨는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보낼까. 그녀의 추억도 가끔 눈보라 속의 나무의자를 지날까.

깊고 푸른 밤 포스터를 그리던 화가 장군영 씨는 3본 동시 상영 영화 포스터 작업이 가장 버겁고도 뿌듯하다고 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산딸기 2」 같은 작품이 동시 상영되었지만, 메인은 ‘깊고 푸른 밤’이었다. 안성기, 장미희의 얼굴은 포스터마다 달랐지만, 안성기의 미소 속에 감추어진 '광기, 야성, 방랑,’은 언제나 선명했고, 분홍색과 갈색이 덧칠해진 컬러는 늘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축축한 낭만과 막연한 그리움 같은.......

학교 담장 너머 포스터에서 웃고 있는 안성기 씨 앞에서, 어색해진 교복 자율화로 더 어색해진 옷을 입고 수업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아득한 고향이 그리워질 때마다 누이 생각이 났다.

‘별들의 고향’

영화 속으로 도망친 경아보다 더 리얼했던 누이는 안성기 씨를 오빠로 여겼다. 상경해서 그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던 누이는 그보다 두어 살 아래, 칠십 초반이다.

상경첫날 서울역 앞으로 안성기 씨가 영화 밖으로 걸어 나왔다면, 누이는 절대신 성당에 다녔을지도 모른다.

평생 누이를 우쭐하게 했던 안성기.

누이는 안성기 씨가 떠난 소식에 어떤 반응일까? 알고 보니 괜히 설렜다고, 별것 아니라고, 저 흩어지는 싸락눈 자락만도 못하다고 말하며 촛대다리를 건너고 있을까. 누이는 추억에 걸려 촛대다리를 건너지 못할 것이다.


안성기 씨가 떠났다. 염화미소를 지닌 그가 영화 밖으로 걸어 나와 신도시 촛대다리를 지나며 빈 나무의자를 바라보고 서 있다.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이편을 보고 있다. 그의 눈으로 눈발이 쏟아진다. 꽁꽁 언 탄천, 어서 가라고 손짓하자 그는 이편을 돌아보며 한참을 서 있다.


“60초 소설로 써드립니다.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나요?”


내 말을 들었는지 안성기 씨가 씩 웃는다.

〈2026. 1. 12. 정자동 촛대다리를 지나며〉